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4): 가상성과 환경미학.(23.02.17 업데이트)

원래 분석미학을 소개하는 글 시리즈는, 은유, 상상력, 창의성이라는 주제까지만 소개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최근 소개하고 싶은 주제가 하나 더 생겨서 그 주제에 대한 소개도 짧게 덧붙이고자 한다. (또 소개하고 싶은 새로운 주제가 생기면, 이 글에 추가하도록 하겠다.)

🔸 가상성 : 추가로 소개하고 싶은 주제는, 가상성(virtuality)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몰입하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기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기들은 게임 시장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공급되기 시작했다. 즉, 몰입적인 가상 현실 경험은, 더 가볍고 간편한 장비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기들이 제공하는 경험을 가상적인 경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몰입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 현실 기술이 발전되기 이전에도, 철학에서는 ‘가상성’에 관한 논의가 있어왔다. 그렇다면, 이 때에는 어떤 것들이 ‘가상적’이라고 일컬어졌는가? (가상성의 외연에 관한 질문)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가상적’인가? (가상성의 내포에 관한 질문) 과거의 ‘가상성’ 개념과 관련된 논의는 현재에 가상현실 기술들을 중심으로 한 가상성 개념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의 실제 현실에 대한 감각이 차단되고, 만들어진 세계에 몰입하는 그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도, 실제 대상의 기능을 비슷하게 수행해서 그것의 대리물 역할을 하는 것들은 ‘가상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가상실험’은, 과학 교과목에서 사용되는 교구로, 학생들이 실험의 대략적인 절차를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 웹상의 콘텐츠이다. 이전에는 플래시를 통해서 사용자와 상호작용이 가능한 가상 실험실을 구현했는데, 플래시로 구현된 실험실은 사용자가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몰입적이지는 않다. (물론 오늘날에는 ‘몰입적’인 가상 실험실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제페토같은 가상현실, 메타버스 플랫폼도, 특별히 ‘몰입적’인 것은 아니다. 제페토는 우리가 다른 자아를 만들어서 활동할 수 있는 어떤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줄 뿐 아닌가? 만약, 가상성이 몰입적인 경험을 하는 것과 별개라면,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과 별개로 가상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상성의 의미, 즉 정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이를 토대로 가상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가상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지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는 현재 진행중이다. 마침 ‘컴퓨터 게임 속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서 가상성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논문’과 ‘가상이 실재하지 않는 것,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논문’이 한국어로 출간되어 있다.

  • 이다민, “컴퓨터 게임 속 행위의 가상성”, 미학,, 2020.

  • 이다민, “가상, 현실, 그리고 허구-가상(virtual)에 대한 철학적 진단”, 미학,, 2022.

이 주제와 관련된 나의 이해도 이 분의 연구를 미리 접해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상성과 관련된 분석미학적 연구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앞으로 이 분의 연구에 주목하시길..!🔍

cf. 가상성과 관련된 연구 주제로는 게임의 미학이 있다. 물론 모든 게임이 가상적인 것이 아니고(ex.스포츠) 가상적인 모든 것이 게임은 아니라는 점(ex.가상 교실)에서, 가상성에 대한 연구가 게임에 대한 연구와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022년에는 게임 미학과 관련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어 논문과 저서가 출간되었는데, 이 저술들은 게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게임의 플레이 유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게임 플레이 경험이 어떤 가치를 가지며,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게임 플레이 경험이 일상으로 과도하게 확장되었을 때의 부작용 등을 다룬다. 두 저술 모두 분석 미학이 새로운 탐구 주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논의 영역을 구획해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 윤주한, 이다민, “컴퓨터 게임의 철학을 위하여”, 미학, 2022.

  • C.티 응우옌 저, 이동휘 역, 게임 : 행위성의 예술, 워크룸 프레스, 2022.

🌏 환경 미학 : 환경 미학의 주요 탐구 주제는 ‘자연에 대한 미적 경험’이다. 이 때 ‘자연’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서 원초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자연 환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개입해서 변형되거나 오염된 자연 환경도 미적 경험의 대상이 되는 ‘자연’에 포함되며, 더 나아가 공원처럼 인간이 인공적으로 조성한 일상의 자연적 공간들 또한 미적 경험의 대상이 된다. (human environment & primitive environment)

그 동안 분석 미학자들은 예술 감상이라는 고유한 경험과 예술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적인 것’(the aesthetic)의 영역을 ‘예술적인 것’(the artistic)의 영역과 구분해서 생각해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의 가치나 감상 경험을 해명하기 위해서 미적 가치나 경험을 해명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캐롤 덕분에, 나도 미적인 것에 관심이 멀어져 있던 터였다. 하지만, 환경 미학 연구자들은 분석 미학 논의가 전반적으로 예술 철학에 치우쳐진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예술이 아닌 것에 대한 ‘미적 경험’이나 ‘미적 가치’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환경 미학의 논의 범위는 자연에 대한 미적 경험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그 관심사를 넓히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이 우리에게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 우리에게 자연을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이유를 제공할 수 있는지, 자연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예를 들면 음식점, 테마파크, 대형쇼핑몰, 경기장)이나 ‘일상의 사물’(그릇이나 유리병, 음식, 의복, 몸)에 대한 미적 경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자연과 일상적인 영역에 대한 미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우리 삶에서 왜 중요한지 등등. 이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미학자들 사이에서도 예술 뿐만 아니라 예술이 아닌 것들에 대한 미적 경험의 가능성을 다루는 논의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연환경과 자연물 그리고 일상의 사물과 공간 등에 대한 미적 경험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 두 가지가 있다. 인지주의는 감상 대상이 되는 자연환경과 자연물에 대한 지식(과학적 지식과 사회·문화적 지식 모두 포함)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특징들 배후에 어떤 자연 법칙이 작동하는지, 어떤 성격의 생태계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감상하는 것이 미적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부처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은 매우 시각적으로는 보기 좋지만, 부처꽃이 외래유입종이며 습지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부처꽃 들판을 본다면, 이 들판을 마냥 아름답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처꽃에 의해서 이 영역의 습지 생태계의 조화가 깨져있기 있기 때문이다. 비인지주의는 감상 대상이 되는 자연환경과 자연물과 감상자 간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 사람이 자연에 참여하고 (자연물을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는 등..) 자연은 사람에게 특정한 감각적 반향을 (시청각적인 경험 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적 경험도 포함..) 남긴다. 이는 사람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자연에 감각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비인지주의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상호작용’이 자연에 대한 미적 경험에서 핵심이라고 보며, 이런 상호작용이 감상자와 감상 대상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고, 감상 대상에 대한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 두 설명 중 어떤 것이 자연과 일상에 대한 우리의 미적 감수성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설명이 자연을 보호해야할 윤리적 이유를 제공해주는 설명이 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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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3) : 상상, 은유, 창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