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3) : 상상, 은유, 창의성.
이 글에서 다룰 상상, 은유, 창의성은 작품의 창작과 감상 등, 예술의 여러 국면들과 긴밀하게 관련있는 개념이지만 상상, 은유, 창의성은 반드시 예술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창의성의 경우, 우리는 예술 분야의 창의적인 성취 뿐만 아니라, 과학 등의 학문적인 분야에서의 창의성을 말하기도 하고, 평범한 일과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상상 또한 다양한 심리적 활동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일과 중에 잠깐 빠져들게 되는 공상에서 부터, 내가 본 물체의 시각적 형태를 떠올리거나 혹은 내가 들은 음악의 멜로디를 머리 속으로 재생할 때 갖는 심상, 철학적 사고실험을 위해서 정교한 가정, 내러티브가 있는 예술을 감상할 때의 드라마틱한 상상에 이르기까지, 상상은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은유 또한 특정한 기호와 상징의 체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은 일상의 대화에서도 설득이나 수사적인 효과를 위해서 은유를 사용하고, 딱히 어떤 효과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은유 표현이 굳어서 은유적인 동일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 또한 은유는 언어적 기호 체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기호들의 체계에서도 나타나기도 하며, 이 또한 조형 예술이나 영상 예술 등의 시각 예술에서만 한정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제들이 분석미학의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이유는, 다양한 인간 활동에서 나타나는 창의성, 상상, 은유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기계적인 지능이 성취할 수 없는 인간성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창의성, 상상, 은유는 역으로 인간의 한계나 어두운 면을 더 잘 보여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항상 상상이나 창의성, 은유를 개인 혹은 공동체에게 좋은 방향으로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빈약한 상상이라던지, 편협한 관점을 강화하는 은유, 옳지 않은 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창의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한계 또한 다른 생명체나 기계적인 지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창의성, 은유, 상상과 인간성의 문제라는 광범위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 보다는, 현재까지 진행되어 있는 창의성과 은유, 상상에 대한 분석미학의 연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상상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살펴보겠다.
💭 상상 : 상상(imagination)은 인간이 갖는 명제 태도의 한 종류로, 철학자들은 믿음(belief)과 달리 상상은 참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믿음이란, 실제 세계에 대한 참인 명제에 대해서 갖는 태도이며, 여기에서 '참'은 믿음의 인지적 적절성을 평가하는 규범적 기준이 된다. 즉, 거짓인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서 결함을 갖는다. 만약 내가 유지했던 어떤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이 믿음을 유지할 실천적 이유가 없는 이상은 이 믿음을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반면, 상상이란 참이라는 인지적 이유에 얽매이지 않는 명제 태도로 간주된다. 즉, 상상의 경우에는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사태, 명백하게 거짓인 사태를 상상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사태들을 상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된다. 물론 이는 상상의 대상이 반드시 거짓이거나 불확실한 사태여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이 향하는 명제는 반드시 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또한 상상의 대상은 명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내가 뭔가를 한다고 상상하거나(imagine doing s/th) 어떤 대상(인물이나 사물)을 상상하는 것(imagine s/th) 또한 상상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를 한다는 상상은 1인칭 시점에서 일어나는 상상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한다'는 명제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조금더 생생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상상하는 것도 그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대상에 관한 상상에는 보통 그 대상이 특정 속성을 예화한 모습,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 그 대상 등, 대상을 특정한 관점에서 상상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이런 저런 속성을 가졌다'는 명제를 떠올리는 것에 비해서 더 생생하다. 물론 명제에 대한 상상 또한 이런 국면들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제에 대한 상상에는 정의 상 반드시 이런 국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명제에 대한 상상은, 특정한 명제를 머리 속에 품는 것(entertaining), 가정하는 것(supposing)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상상과 예술 작품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직관은, 특정한 관점에서 작품이 묘사하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 작품의 감상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분석미학의 논의 또한, 허구 작품의 감상에서 상상이 하는 역할에 주목해서, 작품 감상과 관련해서 제기된 여러 쟁점들을 설명한다. 이 쟁점들에는 앞선 분석미학 소개 글에서 언급된, 예술과 감정, 예술과 지식, 예술과 도덕의 문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소설을 읽으면서, 작품 속 인물과 상황에 대해서 감정 반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작품이 묘사하지 않은 부분까지 채워넣어서 작품 속 세계를 더 풍성하게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에 대한 감정 반응은 작품 속 대상에 대한 실제 행위를 촉발하는 실천적인 힘은 갖지 않는다. 그 감정 반응은 우리가 작품을 매개로 상상하는 상황과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이 우리에게 유발하는 상상은 작품이 묘사하는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관한 더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원천으로 지목되었으며, 작품의 도덕적 가치 또한 그 작품이 유발하는 상상의 도덕성, 즉 그 작품이 작품 속 인물이나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상상하게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하는지 여부에 좌우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비도덕적인 성격의 인물을 상상하게 한다고 해서 그 상상이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물의 사고나 행위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는지, 우리가 그의 행위나 사고를 공감하거나 승인하면서 따라가게 하는지에 따라서 상상의 비도덕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과 관련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분석미학 연구는 작품이 유발하는 상상의 경험에 호소하곤 한다.
하지만, 예술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답변에서 상상이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유발하는 상상 경험의 본성과 그것이 지니는 힘과 관련된 분석철학적 연구는 (특히 한국어로)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상상의 본성과 그 주제에 관한 탐구가 다른 예술철학의 주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흥미로운 연구 주제인데, 이 분야에 관해서도 좋은 연구가 많이 이뤄지길 바란다.
🪄은유 : 분석미학에서의 은유에 대한 분석은 주로 언어의 은유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언어의 은유는, 서로 다른 개체들을 가리키는 개념인 A와 B를 ‘A는 B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난다. A와 B에 해당하는 개체들을 기반으로 이 문장의 참/거짓을 판별하는 문자적 의미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무기력증은 덩굴식물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무기력증'이 가리키는 것들과 ‘덩굴식물’이 가리키는 것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현상/개체들이다. 또한 ‘무기력증’과 ‘덩굴식물’의 뜻, 그 개념이 내포하는 의미도 다르다는 점에서, “무기력증은 덩굴식물이다”는 사실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인지적으로 우리에게 세상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는 거짓 문장일 뿐이다.
하지만, 은유 문장의 인지적 역할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결론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개념들을 병치함으로써 한 개념(주제: 무기력증)을 다른 개념(매체: 덩굴식물)을 렌즈 삼아서 바라보게 한다. 즉, 은유 문장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매체에 해당하는 개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해를 주제에 해당하는 개념에 대한 이해와 견주어봄으로써 무기력증이 갖는 특징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은유가 개념들 간의 비교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지적 기능을 한다는 문제 의식은 은유의 인지적 기능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고, 이 인지적 기능이 어떻게 일어 나는지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학자들을 거치면서 체계화되었다.
데이빗슨(Donald Davidson)은 은유의 인지적 기능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기능이 은유적 의미라는 특별한 의미의 전달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은유 문장은 오직 문자적 의미만을 갖는다. 하지만 은유 문장을 사용한 사람의 의도, 한 대상의 특정한 국면을 보게 하려는 의도 때문에, 은유 문장의 문자적 의미가 거짓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그 문장의 주제에 대해서 주의하고 특정한 태도를 취하는 등의 인지적 효과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은유의 인지적 기능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두 대상 간의 유사성을 볼 수 있도록 이들을 쿡 찌르는 것(nudge)을 통해서 가능하지, 특별한 은유적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언어철학의 다양한 의미 이론들은, 데이빗슨의 주장에 반대해서, 은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탐구했다. 화용론(Pragmatics)을 지지한 학자들은 언어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발화자의 의도와 발화 맥락 같은 외적인 요소를 고려해서 정할 수 있는 화용론적 의미가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들은 은유 문장의 의미 또한 발화자의 의도나 발화 맥락을 바탕으로 추론함으로써 도출된다고 보았다. 한편, 의미론(Semantics)을 지지한 이들은, 문장의 의미란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의 의미와 표현들이 조합된 방식에 관한 체계적인 규칙을 바탕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이들은 은유 문장의 경우에도 그것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한 별도의 언어적 규칙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은유 문장의 의미가 발화자의 의도나 발화 맥락같은 요소들에 의존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서, 맥락적 요소와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을 투입물(input)로 받아들여서 의미를 산출(output)하는 규칙적인 함수를 구체화한다.
강선아, 은유에 대한 철학적 연구 : 언어와 개념의 관계를 중심으로, 2015,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 학위 논문은 은유의 의미에 관한 언어철학의 전통적인 이론에서부터 최신의 이론을 잘 정리하고 그 문제점도 꼼꼼하게 짚고 있는 논문이다. 이론들이 쉽지는 않지만, 은유의 의미를 비롯해서 언어철학이 은유를 설명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할 논문이다.
지금까지는 언어의 은유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논의들을 다뤘지만, 은유는 언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시각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도상적 기호와 상징들은, 시각적 은유 또한 언어적 은유 만큼이나 중요한 탐구 대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언어적 은유에 대한 탐구는 시각적 은유에 대한 탐구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 언어적 은유에 대한 탐구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논제는 바로 은유의 이중성인데, 은유에 대한 경험이 ‘은유 문장 자체에 대한 경험’과 ‘은유 문장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비교하는 경험’ 사이를 오간다는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조심스럽게 제안하자면, 나는 언어적 은유 경험에서의 이중성은, 시각 예술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시각 예술 작품에서도 ‘작품에 포함된 상징적 기호 자체에 대한 경험’과 ‘그 기호가 말그대로 묘사하는 것과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것을 비교하는 경험' 사이를 오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와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시각 예술에서 은유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은유의 이중성이라는 공통적 요소를 매개로 시각적 은유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볼 여지는 있다.
🧑🎨 창의성 : 창의성은 오랜 기간동안 미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였던 것 같지만, 사실 본격적 논의가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철학에서 ‘창의성'이란 개념 자체가 주목을 받은지가 오래되지도 않았다. 물론 예술 작품 창작과 관련된 논의가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명시적으로 ‘창의성'이라는 단어를 소환하지는 않으며, 다만 작품의 창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은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사유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칸트는 뛰어난 작품을 제작하는 천재의 재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현대에는 콜링우드가 진정한 예술(art proper)과 그렇지 않은 예술의 구분을 작품을 만드는 방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옹호했다. 이처럼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이를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창의성'이란 말이 예술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술이라는 영역에 한정되어서 이뤄졌던 과거의 논의들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창의성'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창의성에 대한 철학을 위해서는 어떤 접근법과 질문들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창의적이라고 불리기 위해서 만족해야 하는 필요충분 조건들, 다른 말로 하면 창의성의 정의가 필요하다. 이 정의는, 우리가 실제로 창의적이라고 하는 것들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어야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지, 창의적이지 않은 것들이 왜 그렇지 않은지를 최대한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의에는 (a)새로운 산물이나 아이디어, (b) 이 산물이나 아이디어가 갖는 가치, (c) 산물을 만들어낸 행위자의 특성과 관련된 조건들이 포함된다.
이 주제와 관련된 학술지 논문들은 몇 편 출간되어 있지만, 아직은 기존 연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입장을 구성하는 중이기 때문에,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만 얻을 수 있다. 다음의 논문들이 창의성과 관련된 모든 의문들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이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국내에는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여기까지 이뤄져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수영, “예술적 창의성과 합리성-예술적 창의성의 조건들을 중심으로" , 인문논총, 2021.
이해완, “창의성과 가치 — 결과에서 덕성으로”, 인문논총, 2021.
윤주한, “인공지능과 문예적 창의성: — 허구적 상상력을 중심으로”, 인문논총, 2021.
앞의 두 논문은, 창의성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창의성의 정의를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에 집중하거나(임수영), 창의성의 정의에서 결과물이 중심이 되어왔던 논의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다른 접근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것(이해완)이 앞선 논문들의 목적인 반면, 마지막 논문(윤주한)은, 창의성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인공지능이 이러한 정의에 부합하는 창의성을 지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응용적인 성격의 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