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쿠스 솔루스⟫: 텍스트 기반의 전시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전시 기획이란 무엇일까? 나는 전시를 종종 보러 다니긴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이론적인 씨름이기 때문에, 전시 기획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지 못한다. 막연한 감은 있다. 공간을 대여하고, 작가를 섭외하고, 신작을 만들지 구작으로 전시할지 결정하고 공간에 작품 배치를 어떻게 할지, 작품의 설치와 철수를 언제 어떻게 할지 논의하고, 설치에 필요한 물품을 대여하고, 영상이나 사진으로 전시를 기록해줄 사람들을 섭외하고, 전시장에 비치할 도면과 서문을 만들고, 인쇄하고, 철수 일정을 짜고… 때때로 전시장의 문을 열거나 지키기도 하고… 공간을 채우고 비우고 유지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렇게 일이 많다.
그렇지만 미술 전시는 대체로 기획자의 일을 가시화하기보다는, 작가와 작업을 소개하고 감상자가 작업을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공간을 꾸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작업으로 알차게 꾸려진 전시를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전시의 기획자가 여기에 어떤 식으로 기여를 했을까?’ 의문이 남기도 했다.
수건과 화환에서 열렸던 ⟪로쿠스 솔루스 : 구현되지 못한 기획서의 고독한 장소⟫ 는 기획자들의 기획서들을 모아놓은 전시라는 점에서 기존의 전시들과 매우 다른 전시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기획자의 일에 대해서 막연하게 가진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또 이 전시는, 전시에 대한 기획서들과 그것에 영향을 주었던 문헌들에 대한 전시, 즉 텍스트들로만 이뤄지는 전시였기 때문에,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전시는 과연 어떤 식으로 꾸려질 수 있을지, 어떤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입구 공간에서 기획자로부터 전시에 관한 안내를 받는다. 한 타임에 3명만 예약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같은 타임에 예약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전시의 기획 의도와 관람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러고 나서는 텍스트들이 전시된 안쪽 공간으로 이동한다. 안쪽 공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 전시의 제목이자 전시 기획에 영향을 미쳤던 레이몽 루셀의 로쿠스 솔루스가 놓여있다.
입구를 지나서 제법 큰 가벽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지나면, 큰 철제 선반에 이 전시에 참여한 기획자들 (이우솔, 오상은, 이혜원)의 기획에 영향을 미쳤던 텍스트들이 놓여있다. 텍스트들 중에는 특정한 페이지에 플래그가 붙어있는 것들도 있었는데, 그 부분들은 기획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들, 전시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얻었던 부분들이라고 들었다. 기획자의 안내를 들은 다음에는 큰 철제 선반의 뒤쪽으로 펼쳐진 안쪽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작은 이동식 트레이에 담긴 세 명의 기획자의 기획서들을 읽는다. 트레이 맨 위 칸에는 이우솔 기획자, 그다음에는 오상은 기획자, 마지막 칸에는 이혜원 기획자의 기획서가 놓여있었다. 기획서들이 트레이의 칸에 담겨있었던 기억을 되살려서, 각각의 기획에 대한 나의 생각들도 웹페이지 상의 칸에 나눠서 담아봤다. (기획자 이름 오른편에 있는 ‘+’기호를 누르면, 글이 펼쳐집니다.)
-
이우솔 기획자는 기획자와 관람자가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획안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려 갔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짧은 이야기 속 기획자는 사방 미술관이라는 전시 기획을 관람자에게 설명한다. 사방 미술관이란 ‘도처에 미술관이 있다’는 그러한 의미로 이해했다. 사방 미술관의 기획자는 관람자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가 기증하는 물건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서 미술관을 꾸린다. 미술관이 선택하고 분류하고 연구한 작품들이 관람자에게 전달되는 하향적인 형식이 아니라, 관람자들이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상향적인 형식의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자는 이러한 전시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주 많은 말들을 했다.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이 권위적인 공간으로서 갖는 위계를 해체하는 것, 다양한 관람자들의 물건과 이야기를 전시에 포함시킴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모종의 ‘객관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물건이 인식 주관과 독립적으로 갖는 어떤 성질들을 미술관이 특정한 분류 체계를 통해서 부여한 의미를 통해서가 아니라 감상자가 물건을 서술하는 방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는, 그러한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관람자는 전시의 기획의도와 의미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다가 기획자의 답을 다 듣고 돌연 이 기획을 비판하면서 전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기획을 통해서 위에서 목표로 한 바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왠지 이 말들이 기획자 본인이 자신의 기획에 대해서 가졌던 회의 같았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대화 자체가 기획자 머릿속에서 일어난 자문자답이고 어쩌면 그러한 회의를 기획자가 스스로 마주했기에 이 기획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 외에도 현실적으로는 이 기획이 실현되기 어려운 담지 못한 이유들이 많겠지만, 그런 것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만 이러한 기획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는 소설 속의 세계, 미술관의 역할과 관람자의 관계 설정 등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기획자가 있는 세계는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
오상은 기획자는 자신이 그동안 전시기관의 공모에 지원하거나 기금을 따내기 위해서 만든 기획서들과 더불어 전시 공모의 예산이나 공간과 관련된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 작성한 기획서를 전시했다. 두 번째 기획서의 경우, 버려진 공간, 곧 허물어질 공간을 활용해서 짧은 기간 동안 하는, ‘유랑'을 주제로 삼는 전시였다. 작가와 기획자 팀이 계속해서 바뀌는 공간의 특징에 맞춰서 전시한다는 기획이었는데, 오상은 기획자는 이 전시에 참여하기 전에는 예산과 공간 관련 지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기획안'을 자유롭게 써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특히 미술관에 소속이 되지 않은 독립큐레이터인 이상, 전시 기획을 위해서 연구하고 기획을 하는 일 자체는 직업이 되기가 어렵다. 기획안을 바탕으로 전시 공모에 선정되거나 기금을 따내지 못하는 이상은, 기획안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한 임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급되는 예산에 기획자의 노동에 대한 비용을 포함할 수 있을지도 의문…) 다양한 포맷에 맞춰서 다듬어진 기획서들에는 전시장 도면을 첨부하면서 전시장의 이 공간에 어떤 작품들을 걸 것인지가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었고, 어떤 조명을 써서 이런 효과를 주고 싶다는 것을 이미지화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냥 이 기획서대로 곧바로 실행을 하면 될 정도로 전시의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자세하게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런 자세한 기획서를 훑어보면서, 이 기획서를 만드는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게 되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연구 재단 사업 제출용 연구 계획서에는, ‘앞으로 이런 책을 읽고 논문을 이렇게 쓰겠다’ 이런 내용이 아니라, 이미 문헌들을 다 읽고 논문을 어떻게 쓸지도 다 정한 상태에서 계획서를 써야 된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연구계획서를 쓰는 사람들의 염원에 반해서 사업 선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연구계획서를 쓰는 일이 이미 연구를 하는 일이라면, 이에 대한 임금은 어디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연구자로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노동 단가는 어느 정도 일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혜원 기획자는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문서 형식 안에 구현되지 못한 전시 기획을 담은 텍스트를 전시했다. 그렇지만, 다른 버전의 기획서는 실제로 지원을 받아서 실현되었다는 점이, 다른 기획자들의 기획서와 갖는 차이점이었다. 오상은 기획자와 비슷하게, 기관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기획자의 번거로움이 느껴졌다. 단 몇 페이지만 훑어봤을 뿐이지만, 행정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서 전시의 개요와 목적, 기대효과 등을 설득하는 일의 고됨이 금방 와닿았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연구 지원도 전시 지원과 비슷하게, 공공기관의 문서 형식에 따라서 요구하는 내용들을 채워 넣는 일로 이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획안에는 전시의 개요와 세부 진행 계획, 기대효과와 구체적인 예산안까지 빼곡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때때로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렇기에, 이 기획서가 여러 가지 버전들을 섞어서 만든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기획서 초안과 중간 수정본, 최종과 최최최최종 버전이 뒤섞여있는 기획자의 폴더들을 열어본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기획서의 양도 많고 내용도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문서 형식과 그러한 종류의 문서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들에 친숙했기 때문에 기획안 자체가 상당히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행정 문서의 언어라는 틀에서 이 전시가 갖는 예술적 특이성이나 역량이 얼마나 드러날 수 있을지, 이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행정 문서의 언어들이 적절한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그러한 기획서였다.
기획서에 대한 전시에서는, 텍스트가 주인공이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 전시에서는 전시를 위해서 사용되는 물리적인 도구들이나 공간 구성 같은 것은 이런 전시에서는 부수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텍스트는 조형 예술 작품에 비해서 물리적으로 공간을 덜 차지하고, 텍스트가 갖는 물리적 성질들은, 조형 예술 작품이 갖는 물리적 성질에 비해서 시각적으로 두드러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주인공인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그냥 텍스트가 전하는 내용이 아닐까? 텍스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기만 한다면, 전시 환경이 어떤 것이든지 인쇄된 종이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 전시에서 내가 했던 경험은 이와는 상반되는 경험이었다. 입구를 지나서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걸어갈 때 기획자의 머릿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통로를 지나서 바로 마주하는 커다란 철제 선반들은 기획자의 생각의 여정을 은유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참고 문헌들에 붙어있는 인덱스들이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커다란 철제 선반을 지나서 펼쳐진 넓은 공간은, 감상자가 기획서를 읽으면서 그 전시가 어떻게 실현될지 상상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구현되지 못한 전시의 아이디어들이 잡음을 내면서 떠돌고 있는 머릿속의 깊숙한 동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시의 이러한 공간 구성이 텍스트들에 조금 더 집중하게 만들었고, 길목마다 전시 기획과 관련해서 참고한 텍스트들을 제시한 것은, 기획서들을 읽는 경험을 밀도 높게 만들어주었다.
주변 환경의 특징들에 주의를 하다보니, 기획서들이 약간씩 다른 질감의 종이를 사용한다는 점, 사용하는 폰트나 글씨체를 기입하는 방식도 달랐다는 점도 눈에 들어왔다. 이우솔 기획자의 기획서는, 한지 질감의 종이에 인쇄되었고, 오래된 책의 글씨체를 떠올리게 하는 폰트를 사용했다. 가장 기획서 답지 않은 형식으로 기획서를 작성한 만큼, 기획 내용을 담은 매체도 전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혜원 기획자의 기획서는, 우리가 여러 장소에서 익숙하게 보는 A4용지에 인쇄되어 있었고, 회사에서 볼 수 있는 결재 서류판 안에 기획서가 놓여 있었다. 가장 관료적인 형식의 기획서에 맞는 매체들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오상은 기획자의 경우, 기존 기획서들은 A4용지에 인쇄되어 있었지만, A3 사이즈 정도 되는 종이에 손으로 직접 전시에 관한 아이디어를 기입한 포스터 버전의 기획서도 있었다 A4 종이에 컴퓨터로 입력한 글자가 아닌 손글씨로 전시 아이디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는데, 공모나 기금에서 요구하는 틀에서 벗어난 전시 기획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매체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이 전시를 본 날 우연히도 YPC 오픈 프레젠테이션에서, 세스 시겔롭의 ‘출판으로서의 전시'에 관한 연구 발표(김명진)를 들었다. 그 발표를 들으면서 이 전시 생각이 났다. 세스 시겔롭은 개념 미술가로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물 형태로 많이 제작했는데, 출판물 형식의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미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언어뿐만 아니라, 출판물의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속성들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을 중시했던 작가이다. 발표에서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부분은, 시겔롭이 텍스트 자체가 갖는 물리적 성질들을 통해서도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이 일관되게 드러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겔롭의 그러한 문제 의식이 ⟪로쿠스 솔루스⟫전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로쿠스 솔루스⟫는, 기획자들의 텍스트들을 통해서, 전시가 무엇인지, 전시에서 기획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기획서가 구현되기 위한 현실적인 조건들과 관련된 질문들을 던지기도 하지만, 관람객들이 기획서를 통해서 그러한 질문들에 잘 접근할 수 있도록 전시장의 물리적인 환경을 신경 써서 구성하기도 했다.
텍스트가 주인공인 전시라고 해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게만 해놓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텍스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순서들로 제시되는지, 텍스트의 양이나 크기, 종이의 질감이나 내용이 기입된 형식도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텍스트가 중심이 된 전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전시를 보면서 분명히 텍스트가 전하는 아이디어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