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일기 : 봄의 생각, 일상미학 행사 후기.

노동과 휴식

올해 봄은 기온과 날씨가 들쑥날쑥했던 계절로 기억될 것 같다. 4월에는 대체로 선선하긴 했지만 체감온도가 거의 30도에 육박하는 날도 있었고, 5월 중순부터는 거의 초여름의 날씨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공기가 눅눅해졌다. 그래서인지 기온이 그렇게 높지 않은 날에도, 조금만 움직여도 덥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이렇게 들쑥날쑥하면 걷기 좋은 날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4월 말, 5월 초에 시원하고 걷기 좋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은 걸어갈 수 있는 곳들은 웬만하면 걸어 다니자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열심히 걸어 다니다가 몸살이 났다.

4월까지는 일과 시간 중에 논문 작업을 위한 시간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는데, 5월부터는 강의도 가야 하고, 기획했던 행사 준비도 해야 하고, 마감도 하나 있었고, 수업 조교로서의 업무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논문 작업을 위한 뭉텅이 시간을 내기 어려운 하루가 이어졌다. 타이밍 좋게 ‘글막힘’이 찾아와 주어서, 그 핑계로 논문 작업을 하는 대신, 논문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 없는 책, 논문을 찾아서 흘깃거리고 있다. 내가 어떤 성과를 내는데 도움이 될지를 알지 못한 채,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서 읽는 시간은 참 소중하다.

4월에 여성환경연대에서 하는 달달장에 놀러갔고 거기에서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라는 책을 샀다. 그 책에 수록된 글인 「소비에서 자급으로 좌표 이동: 도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라는 글에서 김현미 선생님은 앙드레 고르의 말을 빌려서 노동에는 타율노동, 자율노동, 자활노동 세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타율노동은 많은 사람들이 보통 수행하는 임금 노동으로, 고용 형태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분가능한 소득을 얻기 위한 노동을 의미한다. 자율노동은 내가 이 일을 통해서 얻는 소득과 상관없이 나의 바람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일기 쓰기도 자율노동일 수 있을까? 확실한 예는 수익모델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되는 프로젝트이다. 마지막으로 자활노동은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을 의미하며, 음식 조리, 식사, 설거지, 청소, 빨래, 생필품 장보기, 운동 등 일련의 돌봄 노동이 여기에 속한다.

김현미 선생님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타율노동을 하면서 보내는 현대인들은 타율노동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를 소비로 해소하고, 청소나 장보기 같은 일 또한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서 외주화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소비자로서의 정체성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걱정이 많고 불안하다. 내가 힘들게 번 이 돈이 헛되이 쓰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는 ‘최저가’를 찾는 기술을 훈련하고, 나의 소비가 ‘가성비’인지 여부를 따진다. 물론 알뜰한 소비 습관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는지가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그 소비를 가성비 좋은 소비, 헛된 소비로 만들지 않는 것에 필요 이상의 노력이 투입되며, 궁극적으로는 돌봄 노동이 ‘돈이 없으면 (혹은 나 대신 그 노동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김현미 선생님은 임금노동 시간을 줄이고 자활노동, 자율노동을 수행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며,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보면서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라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가 책을 빌려가서.. 대강의 조사와 기억에 의존해서 썼음. 다른 글 주장이랑 섞였을 수 있음에 주의!)

이런 내용의 글을 읽어서 그런지, 최근에 또 일과 휴식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했다. 일하는 것은 에너지를 쓰면서 ‘비워내는 일’이고, 휴식은 그렇게 써버린 에너지를 ‘채우는 일’이다. 비워내는 일에는 위에서 말한 타율노동, 자율노동, 자활노동 모두가 포함된다. 나를 돌보는 일인 요리나 청소, 운동 같은 것도 제대로 하려고 하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래서 나는 요리, 청소, 운동.. 다 대충 하는 편이다..) 채우는 일의 경우, 사람마다 조금씩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잠, 멍 때리면서 누워있기, 음악 들으면서 가만히 있기,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책 읽기 등이 포함된다. 사실 잘하겠다는 생각이나 이 일을 수행함으로써 달성하려는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면 무엇이든 ‘채우는 일’이 될 수 있다. 전형적인 휴식의 활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잘 쉬어야 한다는 결심과 의미 있게 휴식시간을 보내자는 계획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에너지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에너지를 쓰는 일이 될 개연성이 크다.

세 가지 노동 구분을 접하기 이전에는 운동, 요리, 청소 같은 활동이 갖는 ‘환기의 성격’ 그리고 이 활동에서 얻는 특별한 종류의 ‘경험’이나 ‘즐거움’ 때문이 이 일들은 나를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돌봄을 위한 활동들이 보통의 임금 노동과 다른 성격을 갖기는 해도 에너지를 안 쓰는 일은 아니다. 이런 활동을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돌봄을 공적인 노동의 영역에서 배제해 왔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곧 여름이 다가온다. 작년에는 너무 더워서 일을 할 기력을 내기가 어려웠고, 휴식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폭염과 폭우, 기후 변화로 인한 각종 벌레들의 습격이 예상되는 여름에 모두가 덜 일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일상 미학 행사 후기.

5월에 있었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Everyday Aesthetics :일상 미학 나누는 일일>을 진행한 것이다. 작년에 환경 미학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모였던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과 함께 일 년 동안 유리코 사이토의 일상 미학 책을 읽는 자발적인 책모임을 진행했다. 나로서는 이 모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충만했다. 실천과 결부될 수 있는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고, 학교에서 같이 읽을 사람을 모으기 어려운 책을 누군가와 같이 읽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마음이었다. 내 결심은 확고했으나 단순히 ‘책 읽자’(심지어 영문 원서..)는 기획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몰라서, 내가 진행한 세미나의 참여자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는 식으로 참여자를 모집했다.

이전의 세미나와 달리 책모임은 비용을 받지 않고 진행했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라는 관계의 자장, 비용의 지불로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의무(참여의 약속과 좋은 서비스 제공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느슨한 형태로도 1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공간과 그 공간의 여러 집기와 장비들을 모임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사람들, 아무것도 없는 기획을 가지고 시작된 모임에 매번 열심히 출석을 해주었던 사람들 덕분이다.

책 모임은 공식적으로 참여자를 모집하고 진행되었던 모임이 아니라서, 관련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지원금을 받아서 그 사용과 관련된 증거를 남겨야 하는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애초에 탄탄한 기획과 구성을 바탕으로 참여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집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책 모임도 뭔가 지원을 받는 기획으로 발전시켜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율노동이 타율노동이 되고… 내가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곱절은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단념했다. 대신 처음에 이 모임이 느슨하게 시작했던 것처럼 이 모임에서 읽을 책에서 파생된 생각거리들을 공유하는 자리 정도는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기획이 5월 19일의 행사에 이르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면 행사의 분위기를 만드는 방식이나 피드백을 수집하는 방식 등 이것저것 배우는 것들이 있다. 나는 컴퓨터에 각자의 발표 자료를 넣고 그것이 모니터로 잘 출력되어서 나오는지 확인하고, 다음 발표자에게 발표 자료를 열어주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그 외의 다른 필요한 일들을 다른 참여자분들이 알아서 다 해줬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고마운 마음뿐이다. 다른 참여자들이 포스터도 만들어주기도 하고, 집에서 차 내리는 도구들도 가져오고, 차를 내리고 쿠키를 세팅하고, 발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는 등 행사 운영에 필요한 일을 알아서 잘해서 그나마 잘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모두의 자율 노동으로 돌아가는 수지 안 맞는 행사였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도 내가 나서서 이런 자리를 도모할 수 있을지(일단 에너지를 채워야 한다.ㅠㅠ), 그리고 이런 자율노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나에게 이 모임은 조금 더 실천적인 함축을 가질 수 있는 이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 그런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다른 참여자들을 이 모임에 나오게 했던 마음은 나와는 약간 다르겠지만, 각자의 관심과 흥미를 따라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표현될 수 있는 자리, 뭔가 해볼 수 있는 자리들이 여기저기에 조금더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느슨하게 시작했던 책모임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담은 발표 행사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 모임은 끝이 났지만 모임의 사람들을 어딘가에서 또 다른 계기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한창 걷는 거리를 늘릴 때 찍었던 사진. 한여름에는 해질녘에도 바닥의 열기가 남아있고 너무 덥기 때문에 이렇게 저녁의 서늘함과 노을이 동시에 앉아내린 풍경을 마냥 느끼고 즐기는 것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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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 일기 : 학기말, 환경 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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