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일들.

연구 재단 사업 선정 그 이후.

5월 중순에 신청한 1년짜리 연구재단 사업은 8월 하순에 최종 선정되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사교육 시장 일을 그만두기 위해서 몇 개의 장학금에 지원했고, 그 중 하나, 학교 본부에서 주는 장학금에 선정되어서 이걸 받는 중이다. 그렇지만 본부는 내가 연구비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장학금과 연구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알려 왔다. 연구비 지급 주체는 연구재단이고 연구를 관리하는 것도 연구재단이다. 내가 연구를 소홀히 해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연구재단의 철퇴를 맞는다. 심지어 내가 받는 장학금에는 연구비의 부분적 수혜를 허용하는 조항도 있다. 그런데, 본부는 왜 나한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 부분적 수혜 조항이 있는데, 학교 규정 상으로도 연구비랑 장학금은 다른데, 왜 이 둘을 굳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일까.

스트레스 속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그래도 할 일은 어떻게든 하려고 애썼다. 하루 하루는 소중하고 아무렇게나 버려 놓을 수 없으니까. 매 순간마다 힘이 들어가 있고 격양된 사고의 흐름에 쉽게 빠져서, 힘을 좀 빼려고 중간 중간 쉬었고, 잠도 일정한 시간에 자려고 노력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힘은 많이 빠졌다. 힘이 빠지고 나자, 사업 포기를 위해서 밟아야 하는 절차들도 차곡차곡 밟아 나갈 수 있었다. 연구재단 사업 담당자와 산학협력단의 담당자를 컨택했다. 연구재단 담당자가 장학금의 연구비 부분적 수혜 조항에 따라서 연구비 부분적 지급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해서, 그냥 모르는 척하고 연구비를 받을까 생각했는데, 괜히 연구비 받았다가 장학금 취소가 되거나 내년도에 재추천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이런 이유로 취소하거나 재추천안하는 것도 이상하긴 함.)그냥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인문대 기획실에 산학협력단으로 협약을 포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기획실 선생님께서 내가 사업을 포기하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연구비를 부분적으로 수혜를 할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일단 공문 발송은 보류하겠다고 하셨다. 이제는 사업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마음이긴 하지만, 본부 결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힘이 조금 났다. 나를 위해서 구제 방법을 모색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행정법은 좀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함. 뭣도 모르니까 이상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는 게 답답하다.)

재미있게 읽은 학술지 논문

위의 일로 스트레스 받는 와중에, 다음 학기 수업 시간에서 미리 읽어오라고 한 논문을 읽었다. 행위 철학 및 도덕 심리학 연구자인 콘스탄틴 샌디스(Constantine Sandis)의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이었다. 어떤 쟁점과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파고드는 본격 논문이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이 유의미한 지점들을 짚어 주는 짧은 논문이었다. 논문에서 강조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 중,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우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내가 공유하는 "공통의 경험",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이 주장은 당연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 철학적으로 중요하게 간주된 적 없는 영역을 짚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1)그 사람이 가진 믿음과 감정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가 지금은 어떤 생각, 감정을 가질지 추론하는 이성적인 방식 혹은 (2)한 사람의 심적 상태(특히, 감정)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공감 능력) 덕에 가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샌디스에 따르면, (2)는 너무 마법같은 능력처럼 언급되어서 받아들이기 힘들며, (1)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해서 알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발화만으로도 그가 왜 저런 말이나 행동을 했는지 잘 파악한다. 내가 그 사람과 삶의 양식을 공유하는 경우에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랑 공유한 경험이 비슷하다고 여겼던 사람의 행동이나 발화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충격이 클 수 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사람이 아예 나랑 다른 종의 생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러면 처음부터 저 사람이 나랑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크게 좌절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샌디스는 공통의 경험과 삶의 양식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이 역사학과 인류학에서 고문헌을 해석하는데 갖는 의의를 짚으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과 내가 통하지 않았던 순간들,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발생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럴 때 내가 내 지식과 능력을 동원해서 가능한 최대의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들여서 이해를 시도하다가 그의 행동과 말을 내 삶의 맥락을 중심으로 단정 지어 버리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힘을 좀 빼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맥락과 삶의 양식을 가정하고 상상하면서 거리를 두고 봐야 한다.

앞으로 읽어볼 논문들

영국미학회(British Society of Aesthetics)에는 Debates in Aesthetics (DiA)라는 저널을 1년에 한 번 발간한다. 학교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연구자부터 포닥 연구자 등이 초기 연구 경력을 만들고자 투고하는 것 같다. 최근 호에 실린 논문들을 쭉 훑다가 땅의 미세한 움직임을 촉각적으로 지각하게 해주는 장치, 청각 장애인들이 소리를 느낄 수 있게 공기 중의 파동을 진동으로 변환해주는 장치가 제공하는 경험을 자신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숭고의 경험으로 해석하는 논문을 발견했다. 우수 논문 상도 탄 논문이다. 읽어 보려고 저장했다.

스트레스 받을 수록 타투 너무 받고 싶다. 연기와 빛을 새기고 싶다. 타투를 일종의 예술 형식으로 이해하자고 주장하는 논문도 같은 학회의 다른 학술지(British Journal of Aesthetics)에 나왔는데, 이것도 나중에 읽어 보려고 생각하고 저장했다. 이미 타투는 나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사실 나에게는 그 정도 의미만으로도 충분해서, 이걸 예술 형식으로 설명했을 때의 장점이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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