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일들 : 세미나, 수업, 비가시화된 노동.

환경미학 세미나와 느슨한 공부 모임.

2022년은 여행과 함께 조용하고 여유 있게 마무리했는데, 연초는 여러 일들로 많이 바쁘게 지냈다. 글쓰기 상담 일과 더불어서, 다음학기 강의자료도 새로 만들고, 논문 검토 및 수정도 계속했다. 수영 실력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고, 그에 맞춰 학위 논문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리고 학교 밖에서 환경 미학 세미나도 진행했다. 작년 7월에 했던 분석 미학 강의와는 달리, 참여자들의 발제가 요구되는 세미나였다. 영어 논문 읽기가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 내가 다 강의를 해야 할까.. 아니면 논문 번역본을 제공해야 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나는 강의 자료나 번역본을 만드는 일에 기본적으로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이고, 다른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까지 할 여유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결국 세미나 형식으로 했다.

사람이 아주 많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정한 수의 인원들과 함께 즐겁게 진행했다. 논문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들, 자기가 갖고 있는 환경을 위한 습관들이나 그 습관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고민이나 감정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쩍 이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함께 1년간 한 권의 책을 읽는 모임도 같이 하기로 했다. 한 달에 한번 모여서 영문 책의 20-30페이지를 읽어오고 발제자의 정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모임으로 꾸려갈 예정이다. 학교 밖에서 장기적인 모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약간은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된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10년 넘게 철학을 공부해서 내부자의 시선으로만 철학의 논의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시선에서 철학 논의들이 무슨 생각을 불러 일으켰는지 좀 궁금해하는 편이다. 그렇게 외부자의 의견을 듣다보면, 그 생각이 내가 처음에 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흥미(ex. 하나의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 반박과 재반박의 구조를 쌓아가면서 자기 의견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흥미로움.)와 비슷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의견들이 나에게 다시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해 주고 방향성을 정립하는데도 큰 힘이 된다.

영어 공부와 비가시화된 노동.

새해에는 영어공부도 새로 시작했다. 맨날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영어 공부는 아이토키 앱을 통해서 하고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 혼자서 표현을 외우고 말해보는 것보다는, 튜터를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상호작용을 하는 경험이 나한테 더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1월 내내 아이토키 앱을 눈팅하다가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범수업을 들었다. 많은 선생님들과의 시범 수업을 거치지 않고 (돈 없음..) 그냥 바로 한 명의 선생님에게 정착했다. ‘다른 선생님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하지만 지금 선생님이 나와 잘 맞아서 이 선생님과 오래 할 것 같다. 지금 선생님은 글쓰기에 대한 피드백을 꼼꼼하게 잘 준다. 말하기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격려를 잘해주고, 질문을 하면 대체할 수 있는 표현들을 많이 알려준다. 선생님이 알려줬던 표현들도 사용하고 싶은데 막상 말할 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한다. 수업에서 배운 표현들을 사용해서 말하려고 의식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글쓰기 상담을 하고 그 일이 아이토키 선생님이 하는 일과 비슷한 형태의 노동이어서 그런지, 수업 들어가기 전에 신경 쓰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글쓰기 과제는 최소한 24시간 전에 낸다던가, 시간을 변경하거나 뭔가 더 봐달라고 요청할 것이 있다면 최소한 수업 4일 전에는 고지하기.. 등. 선생님께 수업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해서 선생님이 하는 다른 일들과 내 수업을 준비하는 일을 미리 조율을 할 수 있게 하는 편이다. 강의, 세미나, 글쓰기 상담 혹은 아이토키 같은 일대일 과외처럼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의 경우, 강의를 하거나 상담하는 시간 동안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문헌들과 이미지 자료를 탐색하면서 강의 자료를 만들고, 이걸 게시판에 업로드하고, 출결, 시험, 수업과 관련된 문의 메일들에 답을 하고,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채점을 하고(때때로 글쓰기 과제 코멘트..), 엑셀로 정리를 해서 성적을 매기고, 글쓰기 상담 안내 메일을 보내고 상담에 필요한 것들을 리마인드를 해주고 참여를 독려하고, 초과 노동 방지를 위한 분량 제한을 걸고, 비대면으로 상담을 할 경우 줌 링크를 만들어서 공유하고, 글을 읽고 코멘트를 쓰면서 상담을 준비하고, 상담이 끝난 이후에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는 것 등… 상담이나 강의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일은 다 강의나 상담 시간 밖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노동은 훨씬 덜 가시화되어 있으며, 강의나 상담 자체에 비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비정규직 교육 노동자들의 급여는 대체로 ‘ 강의 시간 당’, ‘완료된 상담/수업 건 당’ 임금 체계에 얽매여 있다.

그런 체계를 바꾸기 위해서 뭘 해볼 수 있을까. 나한테도 아주 거창한 계획이나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나도 내 노동에 대한 적절한 급여를 수업, 강의, 세미나가 진행된 시간 당 급여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나한테 강의나 세미나 비용을 책정할 권한이 있을 때에도, 내가 이걸 위해서 해야하는 대략적인 노동 시간은 계산하지 않고 시간 당 금액을 책정하는 것…일단은 이 습관을 없애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강의, 상담, 세미나 진행을 위해서 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나하나씩 세목화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강의’나 ‘상담’으로 퉁쳐서 말하지 않는 것, ‘보이는 일’이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보이지 않는 일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가시화하는 것을 통해서 내 노동의 가치를 더 정확하게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은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양을 조절하면서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을 것이다.

(추가: 사실 개인의 결심보다는 제도가 보완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시간강사는 정규직 교수와 달리, 초단시간 근로자로 분류되어서.. ‘보이지 않는 노동’도 인정받지 못하고, 퇴직금도 수당도 받지 못하는 현실..정보라 작가님의 소송은 그런 가시화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다. 내가 고등교육계에서 겪는 문제들은 ‘원래 이 바닥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거나’, ‘내가 더 잘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이기보다는 연구와 강의 노동을 지원할 적절한 제도와 정책이 부재한 결과가 아닐까? 내가 느끼는 개인적인 답답함을 대학원이라는 공간의 특수함이나 대학원에 가기로 선택한 원죄(…)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 연구자를 지원할 제도의 공백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그리고 커피’에서 마신 드립 커피. 햇살이 아주 따뜻한 날이었다.



Previous
Previous

3-4월의 일들 : 학술대회 발표, 팟캐스트.

Next
Next

11-12월의 일들 : 교토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