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월 일기 : 한 해 마무리.

올해의 습관.

11월에는 제법 바람이 매서워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목도리와 모자 없이는 밖을 다니기 어렵다. 9월과 10월에 감기로 아픈 날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면역력이 조금은 향상된 것일까? 11월과 12월의 건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환절기의 온도와 습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따뜻하게 지내려고 한 것도 한몫했겠지만, 학기 말의 늘어난 일들만 하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을 좀 안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연구자들은 학기말이 가장 바쁘다. 강의를 한다면, 기말 시험 채점과 성적 처리를 해야 하고, 학술지 논문 투고나 논문 수정 마감 일정도 연말이나 연초에 몰려있어서 12월에는 미뤄 놓았던 논문 집필 혹은 수정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연구재단 지원사업에 선정된 경우에는 연차 보고서를 써야 하기도 한다. 내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부서도 학기말이 되면 일이 늘어난다. 몇 번의 학기 말을 보내고 나니, 내가 일의 양을 조정하는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스스로가 부여한 마감 일정이 있는 일들(학위논문, 다른 글쓰기 일)을 미룬다. (2) 이 기간 동안은 새로 들어오는 일감은 가급적 받지 않는다. (3) 강의, 평가, 근로장학 일을 할 때에도 내 힘을 소진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 에너지를 넘어서는 만큼의 일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의를 마치고 나면 그날 강의가 어땠는지 너무 곱씹지 않고 쉰다든지 (물론 잘 안됨…ㅠㅠ) 아니면 글쓰기 상담을 하루에 3건까지만 받는다든지…

이렇게 일을 줄이면 하루 중 일정한 시간 동안은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주변을 정돈할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올해 들어서 저녁 시간 이후로 일을 하기가 힘들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그래서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는 운동을 하거나, 목적 없이 여러 책들이나 영상들을 이것저것 옮겨 다니면서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메일 작성 업무는 저녁밥 먹고 나서도 할 수 있긴 한데,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논문을 읽거나 쓰는 일, 다른 사람의 글을 평가하고 코멘트하는 일, 강의자료 만드는 일은 저녁 시간 이후에 하기 어렵다. 아마 내가 올빼미가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국같이 경쟁적으로 자기 계발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일을 해서 성과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이런 습관을 들인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박사 졸업을 한 후의 임용 경쟁을 견딜 수 있을까? (혼자서 15주 수업 2-3개씩 하면 강의 자료 언제 다 만드냐... 벌써부터 숨 막힘.) 예전에 친구한테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시간을 쪼개서 영단어를 외우거나 전공서적을 읽는 모범생의 습관은 20대 중반 정도까지만 유지되었고, 지금은 그런 습관들을 하나씩  덜어내게 되었다고 말한 적 있다. 그것들을 떨쳐내고 내가 새로 받아들인 습관이 ‘저녁 이후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기’인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삶의 질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삶의 방식을 포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어떤 영역이든 눈에 띄는 성과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이러한 ‘다산’을 위해서 하루 시간을 촘촘하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한 사람의 ‘성실성’, ‘능력’, ‘노력’, ‘절실함’을 보여준다고 간주되며, 느슨하고 늘어진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게으름’, ‘무능력’, ‘부족함’의 징표 혹은 일에 절실하지 않고 배가 부르다는 징표로 여겨진다. 이러한 높은 기준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성실하게 일하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나도 스스로에 대한 그런 의심 때문에 예전에는 모든 시간을 더 일에 쏟아부어서 내 능력을 누군가에게 증명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대충 먹고 살 수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모범생의 습관들을 버릴 수 있었다.

저녁 시간 이후에 별 일 안 하고 쉬는 습관을 들이다 보니, 올해는 홈페이지에 연구 일기 외의 다른 글들을 많이 남기지 못했고, 또 학위 논문 작성도 많이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저녁 이후의 시간에 학위 논문 작업을 하거나 개인적인 글쓰기 작업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까? 저녁 시간 이후에 다른 일들을 하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다. 이미 나는 다른 업무들을 일과 시간 중에 끝내기 위해서 충분히 정신없이, 여러 가지 실수를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를 조리해서 먹고, 목적 없이 책과 영상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시간을 보내고, 잠을 자기 전 물주머니와 팥주머니를 데울 때, 비로소 오늘 하루가 좀 정신없긴 했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이런 생각을 더 확고하게 굳혀준 계기는 올해 보고 읽었던 콘텐츠들 덕분이다. 읽다 보면 일과 휴식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나라 직장에서 요구되는 근면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올해의 운동

올해의 운동은 작년부터 계속 배우고 있는 수영이다. 나는 근육이 약간은 있는 편이라서 운동 배우기에 나쁜 신체적 조건은 아니지만,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근육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어릴 때에도 공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운동을 배우는 데 애를 먹었고, 특히 내가 움직여야 하는 활동 반경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힘들었다. 농구, 축구는 물론이고, 배드민턴도 잘 못했다. 그나마 움직임의 반경이 약간(?) 적은 탁구는 좀 배울 만했지만, 예전부터 내가 그래도 따라 하겠다는 감각을 갖고 할 수 있었던 운동은 요가나 필라테스 같이 매트에 누워 몸을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면서 천천히 하는 운동이었다. 수영은 도구를 사용하는 운동은 아니지만, 물에서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 물 밖에서 움직이는 감각과 다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정확한 동작을 하는 것이 어렵다. 왠지 수영을 어릴 적에 배웠다면, 금방 다른 운동처럼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지금도 같은 반의 비슷한 수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배우는 속도를 비교하면 내가 약간 느린 편이다. 특히 평영이나 접영 배울 때는 부분 동작들을 잘 배워서 한 번에 이어서 하는 것이 중요한데, 부분 동작을 하나 완성하는 것이 오래 걸린다. 접영은 입수킥의 감각을 익히는 데 한 달도 넘게 걸린 것 같다. ‘입수킥 - 출수킥 - 입수킥, 출수킥 연결 - 한 팔 접영 - 양팔 접영’ 이 순서로 연습하면서 접영 동작을 완성한다고 생각하면, 접영 하나만 배우는데 거의 다섯 달은 걸리지 않을까… 지금은 한 팔 접영을 연습 중인데 출수킥을 할 때 배 힘과 등 힘을 잘 못 쓰고, 그래서 상체가 잘 안 뜬다. 그리고 상체가 안 뜨면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자유형 할 때처럼 얼굴을 측면으로 보내서 숨 쉰다.) 자유형이나 배영 때와 달리, 접영은 특히 여러 가지 동작들이 합쳐지고 동작을 수행하는 리듬까지 복잡해지니, 이전의 영법들과 달리, ‘이 점을 조금 더 신경 쓰면서 하면 되겠다!’는 그런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뭐 그렇지만 한 팔 접영 배우는 단계까지 왔으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려 무당벌레.

12월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분을 내려고, 주키니 호박과 버섯, 양파, 가지를 넣어서 라자냐를 해 먹었다. 토마토소스가 살짝 매콤해서 상추를 같이 먹으려고 체에 밭쳐서 씻고 있는데, 흐르는 물 사이로 허우적거리는 작고 까만 덩어리를 보았다. 물의 흐름에 따라서 이리저리 쓸려가기만 하는 돌멩이와 달리, 얘는 뭔가 자기 힘으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잠그니 까만 덩어리는 몸을 뒤집어서 자세를 바로 했고, 그때 이 덩어리가 무당벌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빨간 몸에 까만 점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집 주변의 공원이나 녹지에 풀어주었겠지만, 그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고민을 좀 하다가 며칠만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당벌레집을 만들어주었다. 플라스틱 통에 집 주변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랑 나뭇잎을 넣어주었고, 상추 조각 몇개에 설탕을 조금 묻혀서 넣었다. 입구는 물에 얇은 손수건을 적셔서 막아두었다. 무당벌레는 갑작스러운 장소의 변화에 당황했는지 처음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다른 곳으로 조금 이동해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눈이 좀 녹으면 풀어주려고 한다. 그동안 나의 엉성한 돌봄을 받으면서 잘 살아있으면 좋겠다.

날이 따뜻해질 때까지 건강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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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1-2월 일기 : 연구실 출근과 운동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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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월의 일들 : 건강, 연구 근황, 비건 지향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