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월의 일들 : 건강, 연구 근황, 비건 지향의 삶.
건강 근황
9월은 다소 더웠고, 10월은 더웠다 추웠다 기온이 오락가락했다. 하늘이 맑고 선선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 분위기는 단 며칠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9-10월은 7-8월에 비해서는 훨씬 더 걷기가 좋아서 기회가 될 때마다 걸으려고 했다. 낙엽이 잔뜩 쌓여서 은행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길에서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하기도 하지만, 물에 젖은 낙엽으로 뒤덮인 길만큼 ‘가을스러운’ 것도 없는 것 같다.
10월에는 자주 아팠다. 마스크가 감기 바이러스를 막아줬던 지난 2년간 내가 감기 바이러스에 더 취약해져서 그런 걸까, 몸이 아팠던 기간 동안은 따뜻한 물도 많이 마시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일찍 자고.. 아픈 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여름에는 날씨가 더워서 기운이 없었는데, 환절기에는 아파서 기운이 없다. (겨울에는 추워서 기운 없지 않을까..)그리고 연구나 논문, 글쓰기, 강의 등… 하고 싶은 일들, 해야 하는 일들은 여전히 많다. 이럴수록 일을 진행하면서 내가 겪을 문제들, 다가오지 않을 마감 날짜들을 미리 상상하고 압도되지 말아야지. 마감이 급한 것들을 순서대로 하다 보면, 내가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할 문제들 보다는 내가 조금이라도 잘 해낸 것에 집중해서 일을 하다 보면, 완성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느껴졌던 일도 조금씩 진행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건 지향의 삶
기후정의행진을 비롯해서 환경 관련 이슈가 많았던 9-10월이었고, 그래서 나도 덩달아 비건 지향의 삶과 현재의 실천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처음에 육고기 소비를 줄일 때에는 식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규칙들을 세워놓고 그에 따르는 습관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동물성 제품들을 내 삶에서 아예 제거해서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깨끗한 삶’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회색 지대에 발을 걸쳐놓더라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규칙들을 만들고 그 습관을 유지하는 것에 신경 썼다. 예를 들면 ‘집에서 해먹을 때는 비건으로, 밖에서 사 먹을 때는 페스코로’, ‘육고기 음식 사진은 SNS에 올리지 않기’ 같은 규칙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했던 시기에 만들었던 규칙들이었고,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식사하는 일도 많지 않아서, 이 규칙대로 생활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채소를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 콩이나 밀가루에 알레르기가 없었던 것, 거의 프리랜서처럼 일해서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밥을 해 먹는데 쓸 여유가 있었던 것도 채소 위주의 식생활을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콩이나 밀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논비건 동거 가족이 있는 경우, 그리고 장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는 채식을 습관화하는 것이 조금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작년 하반기부터 코로나가 계절성 독감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많은 행사들이 대면으로 진행되고 덩달아 식사 모임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면으로 참석하는 일정과 식사 모임이 많아지니, 집과 일터만 왔다 갔다 하던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비교적 지키기 쉬웠던 규칙들이 이제는 만만치 않은 규칙들이 되었다. 일정이 많아서 피곤했던 날에는, 집에서 치즈를 듬뿍 넣은 파스타를 먹고 싶은 마음에 홀린 듯 슈퍼에서 모차렐라 치즈를 집어오기도 했다. 특히 다른 지역으로 일을 하러 가거나 여행을 가는 일도 잦아졌는데, 지역에는 외식 선택지가 적고, 특히 삼겹살, 갈비 등 육고기 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집에 비건 가공식품들을 충분히 준비해 놓거나, 육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가 있는 식당에 가도록 미리 적절한 식당 후보들을 제시하거나, 주문할 때 메뉴에서 육고기를 빼달라고 조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변의 걸어서 갈 수 있는 슈퍼에는 비건 가공식품을 잘 팔지 않는다. (인터넷 주문을 해도 되지만, 식료품 배송은 포장재가 많이 와서 가급적이면 최소화하고 싶다.) 미리 메뉴를 조율을 하고, 가까운 맛집들을 놔두고 고기 없는 메뉴가 있는 식당으로 사람들을 유도하는 것에는 사회적 에너지가 들어가고, 음식물 처리가 어려운 환경에서 도시락이나 배달음식 등을 먹는 일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예… 그냥 주세요..’, ‘고기만 빼서 남기는 것도 별로인데 그냥 먹죠…’의 상황을 마주하는 일도 잦았다.
올해 들어서 그런 상황들이 조금더 빈번하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육고기 소비를 예전에 비해서 훨씬 덜 하게 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내가 육고기를 소비할 때 갖는 불편한 감정들을 상쇄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체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살고 있으므로, ‘내가 윤리적으로 더 나은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했던 그동안의 노력과 어려움’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허용된다는 식으로, 비거니즘을 실천하지 못한 순간들을 합리화하고, 불편한 감정을 무마하는 사고는 위험하다. 내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비건을 실천할지 여부가 기존에 내가 어떻게 해왔으며, 내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유로 삼게 된다면, 그것은 ‘흠결 없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 자신’에게 취한 나르시시스트 적인 실천이 될 가능성이 크다.
2년 전에 만들었던 비건 지향인으로서의 규칙은 내 개인의 식생활이나 소비와 관련된 규칙이었는데, 이제는 사회적인 조율에 힘을 쓰는 방향으로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어떤 식으로 비건을 실천하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회색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다. 회색지대에서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더 많은 실천들을 말하는 것이 내가 비건 지향인으로서 사는 것의 힘듦을 토로하는 것, 내 선택의 윤리적 흠결 없음을 내세우는 것보다 더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연구 근황
9월에는 새로운 공부모임을 하나 시작했다. 팀 크레인의 심리 철학 책을 번역해서 읽는 모임인데, 2주에 한 번 한 명이 8-10페이지 정도를 번역해 오면, 그것을 같이 보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부분이나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사실 2주에 한번 8-10페이지 정도면 한 달 동안 읽는 양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번 만날 때마다 읽어 가야 하는 양이 별로 많지 않으니 이탈자 없이 모임이 계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분과 학문의 방법론으로 공부한다고 해도, 각자가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조금씩 다르고,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도 달라서 그런 생각의 차이를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그 외에는 원래 하던 공부모임 준비, (느릿느릿) 논문 작업, 11월에 예정된 학술 포럼 발표를 위한 자료를 만들면서 보냈다. 요즘 들어서 학위논문 작성에 ‘뭉텅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뭉텅이 시간이라는 말은 시간 관리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그냥 2-3시간 정도 다른 일(이메일 확인이나 전화 포함.)을 하지 않고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논문 목차를 짜고 전체적인 내용 구성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단계에서는 다른 일들을 하면서 중간중간 논문 작업을 해도 어느 정도는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대략적으로 정해놓은 목차를 ‘절’ 별로, ‘섹션’ 별로 정교화해야 하는 단계에 오니, 뭉텅이 시간 없이는 진행이 잘 안 된다. 다른 일과가 끝난 후의 시간,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서 뭉텅이 시간을 찾을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 밤이나 새벽은 집중이 잘되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잘하고 있나 불안감만 증폭되는 시간대라서… 진짜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차라리 잠을 자거나 쉬는 편이 낫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뒤늦은 소식이지만…11월 10일(금) 오전에 세계 인문학 포럼의 신진연구자 세션에서 동료 연구자 선생님들과 발표를 했습니다. 저는 “창의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덕으로서의 창의성 비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어요!. 창의성을 사람의 탁월한 성격의 일종인 덕으로 보는 입장을 비판하고, 창의성을 창의적인 산물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을 개략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일단은 풀어놓고 반응을 본다는 느낌으로…;;) 이 정의를 조금 더 정교하게 옹호하기 위해서 아직 갈길은 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반응이 있으니 다소 동기부여가 되네요. 이제는 정말로 뭉텅이 시간만 있으면 돼요...
제 논문이 포함된 논문집은 세계인문학포럼 웹사이트의 안내사항 게시판에서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whf.kr/kor/notice/board.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