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월의 일기 : 이사와 학기말, 논문 출간.
집구하기와 이사.
연말의 가장 큰 일은 집구하기와 이사였다. 사실 이 일을 겪으면서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는데, 그래서 따로 글을 몇편 나눠서 써도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근로노동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집을 구하는 것에 관해서, 매번 집을 옮길 때 마다 겪어야 하는 임차인의 노이로제, 내 짐을 새로 구한 집으로 밀어 놓고 이전 임차인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관해서, 집이 일하는 공간이자 쉬는 공간인 사람에게 집을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서.
책상과 의자가 없어서 며칠 간은 좌식 책상에서 할 일을 했다. 그렇지만, 집에 정리하고 설치할 것들도 있어서, 설치 기사님을 맞이하고 집을 정리하다가 일을 했다가… 이리저리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바닥에만 앉아있으니 허리가 아파서 밤에는 폼롤러를 끼고 살았고, 의자만이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래도 새로 구한 집은 이제 생활 공간으로서의 모양새를 거의 갖추었다. 가구도 다 오고 생활 용품들 정리가 되고나니 집이 너무 좋아서 장볼때 빼고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생활과 관련된 영역에서 뭘 배울 때는 항상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 같다. 저번에 요리하다가 손가락 자를 뻔한 것도 그렇고, 기계 사용법도 대충 읽어보고 쓰다가 이상해지면 다시 읽고 허겁지겁 조정한 다음 뒤늦게 고장난 곳이 없는지 살핀다. 접이식 테이블을 접어서 정리할 때 비효율적으로 팔힘을 많이 썼고, 발등에 테이블을 몇 번 떨어트릴 뻔 했다. 코팅된 팬은 너무 센불에 달구면 유해물질이 나올 수 있으니 중불에 달구는게 좋다는 팁을 최근에 주워들었다. 나는 요리를 자주하니까 새겨들었다. 그냥 스테인리스팬을 사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스테인리스 팬 태워먹기.) 매일 매일 집과 물건들에 관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나날이고, 나보다 생활 경험이 더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생활의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또 마주하는 문제들이 달라질 텐데, 그때 또다시 우당탕탕할 것 같다.
학기말과 수료.
집구하기와 이사가 메인 이벤트였고, 이걸 하면서 심적 고생, 물리적 고생도 해서 그런지, 나머지 일들을 내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남는 시간에 차례차례 마감에 맞춰서 기말 페이퍼 준비를 하고 페이퍼 발표를 하고 제출도 했다. 과제 채점도 했다. 사실 학교 일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이사하느라 에너지도 다쓰고 기운도 없어서 이 일들은 무슨 힘으로 하나 너무 막막했는데, 막상 시작하면 어떻게든 하는 것 같다. 페이퍼 하나 제출하고 나니까, '첫번째 페이퍼도 개요만 갖고 있는 상황에서 O일 만에 다 완성했는데, 그럼 두번째 페이퍼도 개요는 있으니까 O일 안에 할 수 있지 않을까?'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어서 설렁설렁하다가 나중에 발등에 불떨어진 자세로 썼다.
마지막 페이퍼를 제출하고 나니 기쁨과 동시에 막막함이 확 몰려왔고, ‘이것이 수료생의 기분이구나’ 싶었다. 재학생 신분으로 받던 장학금의 기간도 끝났으니 이제 새로운 장학금을 찾아야하고, 장학금으로 생활비가 모자라면 일을 해야 한다. 일단은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행보다는, 멍때리고 이것저것 보고 들으면서 방향성을 잡는데 집중하고 싶다.
논문 출간
9월달에 발표했던 논문은 10월 초에 투고했고, 11월말에 출간이 되었다.👏🏻 한 작품을 창의적이라고 할 때 어떤 조건들이 고려되며 이 조건이 무슨 내용을 갖는지 살피는 것이 이 논문의 첫번째 목표이고, 이 조건들 중 행위자 조건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예술적 창의성과 합리성이 이 정도의 관련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이다. 사실 분석 대상이 되는 조건들(새로움과 독창성, 가치, 행위자성) 하나하나가 모두 다 각각 하나의 논문 주제가 될 수 있을만큼 큰 논의 대상이라서 쓰면서도 ‘애초에 세 조건을 한 논문에서 다루지 말고 따로 따로 다뤘어야 했나?’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전체적인 생각을 정립해놓은 다음, 그 방향에서 생겨나는 질문들을 바탕으로 각 조건에 관한 개념적 탐구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 조건들을 조금 덜 깊게 다루는 위험이 있어도, 이 조건들을 모두 한 논문에 집어 넣어서 다루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놓지 않고, 새로움에 관해서, 가치에 관해서, 행위자성에 대해서 들여다보면 자주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새로움이나 가치나 행위자성도 그 자체로 얼마나 큰 주제인지...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논문의 핵심 개념들과 관련된 모든 쟁점들을 다루지 않더라도 그 개념들이 내 연구 주제 안에서 어떻게 엮여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정리한 논문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구 주제를 고려했을 때 개념들이 타당하게 엮여있는지는 여전히 문제 삼을 수 있고, 나도 그 부분과 관련된 부연 설명을 심사자들에게 요청을 받았다.
수정 원고 넘긴 다음에는, ‘이정도면 할만큼했다!ㅜㅜ’는 생각으로, 논문 생각은 거의 안하고 살았는데, 허둥지둥 12월을 보내던 어느날 출간이 되어 있엇다. 이제 내 손을 떠난 논문이니, 제 갈길을 잘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