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과 11월, 12월의 일들.

연구자의 일자리

나는 지금은 수업을 무사히 듣고 학위 논문을 써서 졸업을 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인 대학원생이긴 하지만, 다른 글들에서도 누누히 밝혔듯, 연구자로서 어떤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해외 학술지 투고, 연구재단 사업 지원, 콘텐츠 만들기,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전시에 대해서 쓰기 등 해보고 싶은 일은 많다. 그렇지만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게 주 작업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주장을 곱씹고 근거나 논변을 정리하다 보니, 해보고 싶은 일을 구체적인 차원에서 잘 생각하지 못한다.

사실 이번 한해를 거의 학교 바깥 일을 하지 않고 전업 연구자로만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해는 장학금 덕분에 밖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등록금, 생활비, 주거비 등을 대략 충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논문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논문을 쓰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정말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장학금을 더 이상 받지 못면, 어디에서 이런 여유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 및 다른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니, 장학금 받는 기간이 끝나면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해야할 것이다. 적어도 작년 한해 했던 얼마 안되는 일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일은 하지 말자는 나름의 규칙'은 세워봤는데, 앞으로도 그걸 지키면서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세운 규칙들은 그냥 우리나라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까워보여서...)

예술로 사업 인터뷰

그 와중에도 하나 일을 하긴 했는데, 11월 한달동안은 예술인 복지재단에서 하는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인 '예술로 사업'의 자료집을 제작하는 일에 숟가락을 얹었다. 예술로 사업은 공공기관이나 시민 단체 혹은 민간 기업 등을 한 팀의 예술인과 매칭해서, 예술인들이 기업과 기관의 니즈에 맞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업이다. 사업 기간은 1년 미만으로 짧지만 결과물은 예술 수업 기획, 영상 제작, 홈페이지에 연재할 콘텐츠 제작, 전시 기획, 노래 제작, DM상품 개발 등 다양한 형태를 띈다.

내 친구가 하는 출판그룹이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외주를 받았고, 나는 예술로 사업에 참여한 팀들을 인터뷰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네 개의 팀을 인터뷰했는데, 하나는 직접 인터뷰 하지 못하고 서면 인터뷰로 진행했다. 몇 안되는 팀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터뷰를 하면서 수도권 외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벽화그리기처럼 그냥 단기적으로 활용되는 것 말고, 지역성을 살린 상품개발이나 스토리텔링, 문화예술축제, 문화예술 학교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력으로 예술인이 지역의 공공 기관에 채용되면 어떨까? 6개월,1년 단기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그렇게 되면 지역 예술인이 지역에 대한 리서치도 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역민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도 짤 수 있지 않을까. 예술계 일자리는 프로젝트나 기금 중심으로 단기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데,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지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양질의 예술 전문 인력이 생성하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굴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학기말 페이퍼

12월에는 저번학기와 마찬가지로 학기말 페이퍼를 작성했다. 이제 연차가 쌓이니까, 허둥지둥하지 않고 정해진 기한 안에 구조를 짜고 참고할만한 적절한 문헌을 찾아서 읽고 분석해서 전체적으로 논문 꼴을 갖춘 글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논문을 읽고 논문들을 읽으면서 글을 어떻게 구성할지 이리저리 짜보고 생각하는 것은 힘들면서 재미있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힘든 순간은 이럴 때 찾아온다. 참고문헌 뒤적이면서 구성하고 글을 쓰다가 보면 비슷한 참고문헌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논문이 이미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내가 다른 문제의식이나 아이디어를 더해야 논문의 의의가 생긴다. 그렇다고 내가 써놓은 것이 아예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거대한 할일 더미에 올라앉은 느낌이 들어서 힘들다. 그럼에도 이 순간에 약간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다른 사람도 나랑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는 것을 발견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힘들어도 이런 감각 때문에 다시 어떻게든 쓰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다.

코로나와 함께 한 연말

원래는 연말에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같이 시간도 보내는데, 코로나 19때문에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1시간 이상 이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12월 내내 학교에만 있었다. 학기말 페이퍼 제출 기간도 다 12월 마지막주에 잡혀서 그냥 페이퍼나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향형 인간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놀고, 주변 정리도 하면서 시간을 잘 보낸다. 이번 달은 모든 끼니도 거의 혼자 먹은 것 같다.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한 시간은 조금 그립다. 베이스 연주는 손에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합주도 하고 싶다. 나는 그냥 개인 연주하는 것보다 합주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타입이다. 합주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 대충 각자의 연주를 맞춰보고 소리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곡을 숙지해서 오자는 약속. 그래서 나는 합주날과 합주할 곡이 정해지면, 그거에 따라서 연습 계획을 세우고, 공강 시간에 중간중간 밴드부 동아리실에 가서 계획을 이행하곤 했다. (MBTI로 따지면, 너무 J인간 스러운 것..) 연습 단계는 (1) 악보 확보 (2) 노래들으면서 연주할 노트 확인 (3) 악보보면서 칠 정도로 연습 (4) 악보 외워서 연주할 정도로 연습. 이 네 단계를 거친다. 첫 합주 전까지 (3)까지는 해놓자는 것이 내가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외우는 거는 합주 상황 봐서 유동적~)

노래듣고 베이스 소리 못딸 때에는 (1)이 있었는데, 부정확한 악보도 많고, 악보 없는 곡도 점점 많이 하게 되면서 (1)과 (2)가 뒤섞이게 되었다. 노래들으면서 연주할 노트 확인하고, 그러면서 악보를 만든다. 그래봤자 대충 나만 알아볼 수 있게 노트만 찍는거지만... 아무튼 이런 계획을 대충은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사람들과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그런 경험을 다시한번 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노래들 합주하고프다. (바이브가 말하길 나의 올해의 노래라고..)

올해 연말은 거의 혼자보냈지만,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사람과 쿠키를 교환해서 먹었다. 쿠키 덕분에 간식 걱정 없는 풍요로운 연말이 되었다. 1월에는 상황이 조금더 나아져서, 지금만큼은 코로나 19의 눈치를 덜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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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일들: 종강, 장학금 지원, 교수법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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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일들: 논문 투고와 학기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