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known Resource⟫-도면을 들고 전시장을 탐색하기.
이 글은 지나간 전시에 대한 두 번째 관람기이고, 마찬가지로 개강 전에 본 전시이다. 전시가 끝난지 거의 두달이 지나간 시점에서 쓰는 글이라서 머쓱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전시는 반드시 전공 지식이 있어야만 즐겁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와닿는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사박, 박은진, 왕인영, 정은진, (기획 : 임현영) ⟪Unknown Resource⟫, 2021.8.22-2021.9.3 @Weksa
나는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은 비교적 조직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품을 볼 때도, 작가가 일시적으로 채택하는 것이건 상당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킨 것이건, 나름대로 갖고 있는 조직화의 방식, 다른 말로 하면 작가가 작업할 때 따르는 감각을 전제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작가가 실제로 채택한 방식을 캐물어서 찾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 전시장을 슬렁 슬렁 돌아다니면서 내 나름대로 구성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의 현대 미술에 대한 인식은 제각각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을 수 있다.: “현대 미술 작품은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을 것이며, 작가는 자신이 도달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굳이, 진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진리의 자리에는 정념, 시대정신, 원리 등.. 대충 근본적인 것을 뜻하는 단어 아무거나 와도 괜찮다. 네 명의 작가와 기획자가 ⟪Unknown Resource⟫ 전시를 통해서 뒤집어보고자 하는 것도, 작품에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덜 근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이나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을 작품의 재료나 소재로 삼아서 작업을 해나간다.
전시장 구석의 빈 공간을 채우고 전시에 활용되는 구조물을 활용하는 것(왕은진), 화장실 타일, 거울에 핀 곰팡이, 오래된 이불의 캐릭터 같은 소재들을 글리터를 덧칠해서 그리는 것(박은진), 타임라인에서 본 이미지들에서 출발해서 원본 이미지를 알 수 없는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것(사박), 단단한 돌탑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성긴 돌탑을 짓고, 점토로 만들어진 가벼운 주렴을 내리는 것.(정인영) 네 명의 작가 모두 휘발되는 것들과 부수적인 것들, 별로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는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장으로 초대하면서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예술에는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뒤집어보자는 문제의식을 추동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작업을 하고 전시를 꾸리는 것이 어떤 성격의 일로 느껴질지를 생각해본다. 미술사의 거장들에 대한 칭송, 이것도 작품이면 나도 예술하겠다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의구심, 그 속에서 어떤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될 것 같다는 압박, 작업한다고 월급 나오는 것은 아니므로 지원 프로그램 일정 놓치지 않고 각종 프리랜서 노무에 참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피곤함,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뒤섞인 박스가 매일매일 배달되는 느낌일까. 덜 근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략을 취한다고 해도 작업의 실질적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덜 근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의미가 없어보이는 것들을 소재로 삼아서 작업하는 것의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면, 소박하더라도 어떤 의미를 갖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Unknown Resource⟫는, 전시 공간을 굉장히 다양하게 활용해서 작품들을 배치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구성이 감상자가 전시 공간을 탐색하면서 작품과 만나고 나름의 의미를 찾게 하기 위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전체적으로는, 작품들이 전시공간의 여기저기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도에서는 낚싯줄에 걸린 풍선(왕은진의 <사이의 존재>)을 이리저리 피하거나 슬쩍슬쩍 건드리면서 걸어야 했고, 전시공간들 사이의 통로나 창에는 작은 지점토 덩이들이 낚싯줄에 걸려서 드리워져 있어서 전시장 풍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정인영의 <Pebblefall 1~2>) 회화 작품들은 눈높이 아래에 걸려있거나 벽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박은진의 <Net pattern>과 <Floating Ghost>) 아예 전시장 한가운데 드러누워있는 회화 작품(사박의 <세마리의 고양이>)도 볼 수 있었다.
작품이 이렇게 전시공간의 이곳저곳을 가로지르는 전시의 경우, 전시장 곳곳에 숨어있는 작품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재미 요소가 된다. 전시 도면을 보면 이 공간의 어디에 가면 작품이 있는지 알 수 있긴 하지만, 도면은 아주 정확한 지도라기 보다는 대강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 작품 크기가 작고 전시장 구석에 놓여있다면, 도면을 봤다고 해도 다시 주의를 기울여서 찾아야 한다. 작품인지 아닌지가 아리송한 재료로 만들어진 경우, 도면에서 작품의 제목과 재료를 확인해서 내가 지금 보는게 작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왕은진 작가의 작품이 특히 그러했다. 왕은진 작가는 작품을 전시장의 구석에 배치하기도 했고(<구석에 존재하는 것 1~5>), 그림을 거는 레일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레일사용법(손잡기)>), 그래서 작품이 전시 공간에 원래 있는 구조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박 작가는 회화 작품을 전시장 바닥에 기대어 놓고, 수납 상자나 간이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눈과 입>, <이런 저런 것들>) 작품을 중요하지 않은 사물처럼 배치하는 것이, 갑자기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휘발성이 강한 이미지라는 주제와 호응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정인영 작가의 조각(<Gonggi 1~2>)에서는 반듯한 모양에서 많이 벗어난 돌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다. 형태, 두께, 크기, 표면의 그라데이션과 질감이 제각각인 돌들이 붙어있는 모습이 뭔가 오묘해서 계속해서 보았다. 조각에서 사용한 돌들은 미술 재료들을 사용해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작품 주변을 돌면서 여러 각도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박은진 작가의 작품에서는 표현 방식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묵은 때가 말라붙어 있을 욕실 타일의 한 구석을 확대해서 반짝거리는 패턴처럼 보이도록 묘사한 것(<녹슨 타일>), 거울의 곰팡이를 요정으로 은유해서 글리터와 비즈를 붙여가며 묘사한 것(<Fairy in the mirror>), 담요에 그려져있는 트위티의 얼굴 부분을 큰 캔버스에 확대 묘사한 것(<Tweetie Pie Blanket>)이 인상적이었는데, 은은하게 불쾌함을 주는 일상의 요소들을 걸러보는 작가의 필터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시는 재미있게 보았지만, 글을 쓰다가 내가 작품 사진을 골고루 찍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다행히 더 많은 사진이 전시장 웹사이트(http://weksa.kr/archives/portfolio-item/unknown-place)에 올라와 있으니 참고해도 좋다. 전시 끝난 이후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데도, 제한된 사진으로 기억을 더듬으면서 여기까지 쓸 수 있었다는 건, 전시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