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R Bakery⟫ - 미술케이크를 구매/감상하기.
나의 여가 생활에서 전시 관람은 빈도는 많지 않아도 큰 역할을 차지한다. 물리적으로 신체를 이동시켜서, 특정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잘 정돈된 공간에 내 신체를 위치시키는 경험은, 별 이동 없이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는 경험(소설 책 읽기, 넷플릭스에서 영화나 드라마 보기)과는 구분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정돈된 공간에서의 경험을 좋아한다.
내가 전공하는 학문이 미학, 예술철학이기 때문에, 내 취미가 이런 것이고, 전시 관람은 보통 사람들은 지닐 수 없는 취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예술철학 공부를 하다가 전시 관람에 취미가 생긴 것이 아니라, 전시 관람을 좋아했고, 그것에 취미를 갖고 있다가 저런 공부(?)를 하게 된 케이스에 속한다. 나에게도 미학이나 예술철학적 이해나 지식이 전무했던 뉴비 시절이 있었고, 그때도 나는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좋아했다. 뉴비 시절에는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일단 많이 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은 좋아하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약간의 현대 미술 취향도 생긴 것 같고, 뉴비 시절의 나와 전시를 보는 방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전시 관람에서 좋아하는 부분들은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지식과 이해가 생기면서, 내가 전시에서 좋았던 것들에 대해서 약간 확신을 갖고 이 경험들을 조금더 잘 정돈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는 누군가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것일까..?)
이 글은 지나간 전시에 대한 관람기이다. 개강으로 바빠지기 전에 후다닥 봤고, 개강 이후 할 일들이 있어서 또 늦게 글을 쓰게 되었다. 전시 본지는 한달이 넘었다. (...) 내가 본 전시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전시는 반드시 전공 지식이 있어야만 즐겁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와닿는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고등어, 김진주, 송수형, 유도희, 이정우, 이채은, 임소담, 한수지, 홍학순, ⟪NR Bakery⟫ @무너미. 2021.8.10-2021. 8.22.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작가들이 참여한 전시로, 미술과 베이킹이 물리적 재료들을 다루고 구조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나는 웹페이지를 통해서 전시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사이트의 만듦새에 반해서 여기저기 뜯어보다가 상당히 먼 동네인 수유동까지 가게 되었다. 전시는 웹사이트(http://open-station.org/nr-bakery 현재 작동하지 않음.)와 오프라인 팝업스토어를 통해서 작가들이 만든 디저트와 이 디저트를 올릴 세라믹 플레이트를 소개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작가들이 만든 디저트와 세라믹 플레이트를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진을 누르면, 이 디저트를 만드는 방법과 더불어서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이런 디저트를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작가 소개를 누르면, 각 작가가 만든 디저트를 페르소나로 삼은 다람쥐 캐릭터의 주민증(...!)이 나온다. 이 웹사이트 자체가, 디저트들이 다람쥐 캐릭터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거주하는 공간처럼 느껴져서 귀엽기도 했다.
무너미는 원래에도 디저트 전문 카페로 영업을 하던 곳이다. 원래 이 카페가 어떻게 꾸며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시 기간 동안은 전시 컨셉과 맞춰서 카페를 꾸며놓은 것 같았다. 웹사이트에서 나오는 배경 음악과 영상이 카페의 분위기를 웹사이트와 비슷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는 카페에서 파는 디저트들을 전시했을 진열대 위에는, 작가들이 만든 디저트가 세라믹 플레이트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접시는 케이크의 형태를 본따서 만든 그림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넓고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디저트들이 올라가있었는데, 평범한 유리 디저트 진열대에 들어가있는 것도 아니고 디저트도 일반적인 형태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설치 작업 같았다. 나는 까만테이블 위 왼쪽에 있는 고등어 작가의 흰색 케이크를 포장해서 왔다. ‘미술 케이크’인 셈인데, 음식의 컨셉과 기능을 취하지만 먹을 수 없는 재료로 이뤄진 음식 미술품 혹은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하게 맛있지 않은 음식 미술품들과 달리 맛이 있었다.(헤이즐넛 프랄린을 찾아서 크림을 와구 와구 퍼먹게 되는 디저트였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식사(meal)를 하는 것과 관련된 미학적 논의가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 끼의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떤 미적 경험의 잠재력을 갖는지, 음식이 어떤 점에서 예술과 유비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들을 다룬다. 그리고 그 논의에 참여한 존(Eileen John)은 “Meals, Art, and Meaning”이라는 논문에서 작품 감상과 달리, 식사에서는 경험과 의미의 통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p.47) 어떤 것이 예술이 되려면, 적어도 감상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특정한 요소들을 구별하여 제시해야 하지만, 음식의 경우에는 이런 요소들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식사에서는 예술 감상에 비해서 감상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의미를 찾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사에 어떤 의미도 부여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식사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음식의 맛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식문화, 누구와 식사하고, 어떤 대화를 하는지 등의 개인적 차원에도 걸쳐있고,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는 이런 여러 의미들이 조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유하게 내버려둔다는 의미이다. 물론 작품 감상 경험도 다양한 차원들을 갖는다. 작품의 형식적 구성, 작품이 전제하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 그와 공명하는 나의 과거 경험이나 지식, 동행인과 나눈 대화는 작품 감상 경험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 경험의 요소들과 의미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체계화하는 등, 감상자가 나름대로의 조직적인 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이 식사를 하는 것과 작품 감상의 차이이다.
이는 사람들이 음식과 예술을 대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식사하는 것을 예술 감상과 더 비슷하게, 혹은 예술 감상을 더 식사하는 것과 비슷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전시에서 시도한 것도, 식사하는 것과 예술 감상이 비슷해질 수 있는 지점들을 극대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치작품처럼 보이는 디저트, 디저트를 올려놓기 위한 독특한 형태의 접시, 자신의 디저트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이 디저트를 조직적인 의미 부여가 필요한 대상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먹을 수 있는 재료들로 작품을 만들고, 이 작품을 보통의 디저트 카페에서 서빙하고 포장이 가능한 음식으로 판매하는 것은 뭔가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를, 디저트집 투어와 비슷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한 교차들이 흥미로웠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