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디스코그라피 공연: 짧은 후기.

대학원 일기에는 뭔가 연구 생활과 관련있는 내용만 적어서, 내가 연구밖에 안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연구 생활은 각종 여가 활동들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다. 내가 쉴 때 주로 하는 것들은 전시 관람과 공연 관람인데, 2020년에는 외출을 줄이느라 전시나 공연은 거의 보지 못했고, 대신 유튜브가 새로운 여가 활동에 추가되었다.

특히 전시는 가끔 보러 가도, 공연은 정말로 1년 내내 보지 못했다. 나는 작년에 2월 말에 있을 백예린 1집 콘서트 추가 공연 예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2월 중순즈음 코로나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서 추가 공연이 취소되었다. 백예린 해외 투어 일정도 취소되어서, 유튜브로 30분 정도, 1집 곡들 몇개를 라이브로 공연하는 이벤트를 했던 기억도 난다. 잘씻은 딸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공연을 봤다.

이벤트성 공연이 아니라, 풀 공연을 온라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밴드 공연을 직접 찾는 사람들은 사람들은 현장 사운드의 입체감을 즐기는 사람들인데, 온라인으로 공연을 해도 수익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충분히 예매를 할까? 공연하는 팀은 영상 송출이나 사운드 등 더 신경쓸 것이 많아지는 상황인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온라인으로 한다고 해서 티켓 값을 더 내릴 수도 없지 않을까?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서 내가 좋아하는 팀들의 공연이 재개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마지막 공연 관람이 언제쯤인지도 잊어갈 무렵, 9와 숫자들의 디스코그라피 공연이 1월 27일, 28일 양일간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집 <9와 숫자들>부터 EP앨범 <유예>, 2집 <보물섬>에 수록된 곡들을 순서대로 차례차례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나는 '유예'라는 곡을 통해서 이 팀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곡도 포함되어 있고, 공연에서 잘 안하는 곡들도 들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예매를 했다.

특히 가격이 합리적인 것을 넘어서서 '이 정도면 남는게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한번에 2시간 정도 (홈페이지에는 1시간 반이라고 나와있지만, 거의 2시간 가까이 했음.) 하는 공연을 보는데 25000원이었고, 공연을 스트리밍해줬던 플랫폼에서 공연 VOD영상도 무제한으로 계속 볼 수 있었다. VOD영상을 보기 위해서 추가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었다. 이틀 공연을 보고 VOD도 볼 수 있는데. 50000원이라니...! 티켓 가격을 좀 올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MC를 맡은 멤버가 간단하게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고, 곧바로 앨범에 있는 곡들을 순서대로 연주하였다. 공연장에서는 관객들의 기분을 돋우고, 감정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역동적인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보통은, 호응을 유도할 수 있는 곡들을 중심으로 셋리스트를 따로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현장에서 관객들의 분위기를 돋우고 이를 눈으로 확인하는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한 앨범의 정서와 분위기를 라이브 연주로 전달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 스피커로 소리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앨범에 녹음된 곡을 듣는 것과 라이브 연주로 곡을 듣는 것은 꽤 다르다. 아직 이 차이가 정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빈약한 은유 능력으로 표현해보자면, 앨범에 녹음된 곡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문지를 수 있는 작고 단단한 조약돌 같은 느낌이고, 라이브로 연주되는 곡들은 익숙한 곳을 산책할 때 만나는 것들, 나무와 건물에 드리워진 햇빛의 무늬, 그 사이를 굽이치는 바람 같은 느낌이다. 소리의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치만 무엇보다도, 앞에 음식 놓고 먹으면서 음악들을 수 있는 것이 온라인 라이브 공연의 큰 행복이다 !

공연 중간중간에 팀 멤버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읽거나, 근황 토크를 하기도 했다. (사회보신 멤버 분들도 담백하고 깔끔하게 사회를 잘 보셨다! ) 유료 공연이다 보니 이 팀을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 이 팀의 앨범도 사고 공연에도 간적있는 사람들이 주로 들어왔는데, 뭔가 내집단 구성원들의 모임이여서 그런지 따뜻한 시간이었다. 브이라이브처럼 하트 누를 수 있는 기능도 있어서 하트도 많이 눌렀다. 실시간 방송에 채팅으로 참여해본 경험도 잘 없고 해서, 좋은 기분을 하트로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여러 모로 좋은 시간이었고,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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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유니버스>의 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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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2): 미, 재현, 허구.(23.05.29 책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