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젬들 — Suyeong Lim 📚

* 일부 에피소드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

**본 글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들은 스티븐 유니버스 채널, 카툰 네트워크 아시아, 카툰 네트워크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공식 채널에 업로드된 클립 영상들에서 갈무리함.

외계 종족, 젬

나의 <스티븐 유니버스> 입덕 계기는 펄의 대사였다. 펄은 시즌1에서 인간에게 뼈때리는 코멘트를 날린다. 오락실을 보면서 '인간이 시간을 낭비하는 흥미로운 방식'이라고 말하고, 비치 시티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과 관련된 각종 음모론을 펼쳐놓는 로날도의 블로그에 대해서는 '짧고 지루하고 하찮은 삶을 사는 인간은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펄의 대사에 웃고 나도 같이 뼈맞았다. 그러면서 이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스티븐 유니버스> 시즌 1 "Arcade Mania" 이 에피소드에서 젬들은 오락실 게임의 규칙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젬들마다 종류와 정도 차가 있기는 하지만 <스티븐 유니버스>는 젬이 인간과는 다른 종이라는 점을 상기해주는 이질적인 요소들도 잊을만하면 보여준다. 인간의 관습이나 문화에 딱히 큰 관심이 없고 그것에 인간만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습. 예를 들어서 가넷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제이미에 대해서, 인간의 연애 서사만들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답장을 쓴다.

또 다른 젬인 페리도트는 신체 부위나 도구들을 그것이 갖고 있는 '이름'으로 부르기 보다는, 그것의 '기능'으로 부른다. 귀는 '머리구멍'(head hole), 발은 '중력 연결기'(gravity connectors), 손은 '촉각 단면'(touch stumps)이고, 망치는 '규칙적 분쇄기' (rhythmic pulverizer), 스크류 드라이버는 '지렛대 최적화기'(leverage optimizer)이다. 신체부위나 도구의 기능을 요약한 명칭인데, 홈월드의 기술자 젬이 갖고 있는 기능중심적인 시각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페리도트는 루비와 사파이어의 결혼식에서 꽃을 던지는 화동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이 때도 결혼식 분위기에 맞춰서 꽃을 사뿐히 뿌리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꽃을 던지면서 등장한다. 꽃을 다 던진 후에는 "Wedding Commander"인 스티븐에게 꽃을 모두 사용했다고 '보고'한다. 이때의 말투와 행동의 모습은 잘 훈련된 군인의 면모를 떠오르게 한다.

젬과 인간

젬이 인간의 문화나 관습을 신기하게 보거나 그 의미를 달리 이해하는 것, 혹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는, 젬이 인간과 완전히 다른 문명에서 온 외계의 존재라는 점과 관련있다. 젬은 유기체가 아니며, 신체의 중앙에 있는 젬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에 음식을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할 필요도 없고, 잠을 잘 필요도 없다. 젬들에게 음식먹기와 잠자기는 필수 활동이 아니라 기호 활동이다. 예를 들어서 펄은 음식 먹기를 정말로 싫어하는 반면, 애머시스트는 인간의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긴다.

애머시스트는 가넷이나 펄에 비해서 인간이 하는 활동(음식먹기, 레슬링, TV 시리즈 보기 등)에 더 많이 참여하는 젬이긴 하지만, 항상 인간과 같은 이유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애머시스트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맛을 음미하지 않으며, 단지 음식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느낌을 좋아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가 먹는 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애머시스트는 음식물 포장지도 먹으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다 쓴 티백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사용하는 사물로 변신해서 그 사물의 기능도 능숙하게 수행한다.

<스티븐 유니버스> 시즌 3 "Crack the Whip" 에서 라디오로 변신한 애머시스트. 애머시스트는 이외에도 공, 야구방망이, 차량용 아기 시트와 장난감 자동차, 헬리콥터 등으로 변신한다.

또한 젬들은 수천년 이상을 살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도, 혹은 앞으로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할 수 있다. 시즌 3에서는 스티븐의 아빠인 그렉이 인간 동물원(Human Zoo)에 갇혀서 다 함께 구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빠에 대한 걱정으로 조급해하는 스티븐에게 펄은 거기까지 가는데 70년이 걸리고, 그렉의 탄생 110주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70년은 수천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젬에게는 그리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 기준으로는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등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젬들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스티븐이 자고, 씻고, 먹는 등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시간에도 젬들은 항상 포털을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이처럼 젬들이 지구의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러 생명체들의 보존을 우선시하게 된 것은 젬들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스티븐 유니버스> 시즌 1 "Together Breakfast" 스티븐이 만든 아침 식사를 거절하고 할 일을 하러가는 가넷.

젬 종족이 수천년 간 쌓은 지구와 우주에 대한 경험은, 그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에 녹아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이 하는 행동들, 인간이 당연하게 참여하는 관습의 의미가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유니버스>는 인간과 젬 종족이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비롯된 차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퓨전의 의미

젬이 인간과 다른 종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퓨전’이라는 결합 또한, 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고려해야 하는 특성은 젬이 무성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퓨전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맞지만, 이 관계가 연인 관계와 유사한 관계일까? 물론 <스티븐 유니버스>는 젬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통해서 이들의 관계를 연인 관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고, 이는 수많은 2차 창작의 불을 지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젬들의 퓨전은 연인 관계에서 중시되는 성애적인 사랑보다는 인식적인 요소가 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퓨전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젬의 경험과 시야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아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능력을 가진 새로운 젬이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예를 들어서 사파이어는 루비와 퓨전함으로써 새롭게 열린 세계에 관해서 말한다.

사파이어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젬이지만, 그가 홈월드를 위해서 일할 때에는, 홈월드의 식민지 건설에 영향을 미칠 미래들만 보고 예측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하나의 곧게 펼쳐진 명백한 줄기"만 펼쳐져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루비 덕분에 "무한한 수의 가능한 미래들, 아주 작은 의지의 힘만으로 바뀌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여러 줄기의 가능한 미래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퓨전은 보통의 연인 관계와 달리, 배타적인 관계도 아니다. 스티븐은 코니와 퓨전해서 스테바니가 되고, 펄과 퓨전해서 레인보우 쿼츠가 되고, 가넷과 퓨전해서 썬 스톤이 되고, 애머시스트와 퓨전해서 스모키 쿼츠가 된다. 그리고 펄, 가넷, 애머시스트 모두와 퓨전해서 옵시디언이 된다. 가넷을 비롯한 소수의 젬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젬과 퓨전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고, 다양한 젬들과 퓨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젬들의 고향인 홈월드에서 서로 다른 젬들 사이의 퓨전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홈월드 젬들이 더욱 고립된 관점을 갖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한 사회에서 같은 역할을 수행해온 젬들의 결합은, 그 역할을 더 잘 수행하는 젬의 탄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젬들이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던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같은 인식을 지닌 젬과의 퓨전을 통해서 강화되고, 단단하게 굳어 간다. 자신이 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안다는 믿음, 자신이 그 역할을 꽤 잘 수행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은, 깨고싶지 않은 안온한 꿈이다. 다른 젬과의 퓨전은 그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다른 젬의 경험과 새로운 정체성을 통해서 자신의 다른 가능성을 몸소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젬과 인간

젬과 인간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은, <스티븐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인간들과 젬들의 관계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렉이나 코니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비치 시티의 주민들 중 크리스탈 젬과 친분 관계를 맺는 주민은 거의 없다. 그 와중에 젬과 관계맺은 몇 안되는 주민 중 한 명이 비달리아이다. 비달리아는 과거에 애머시스트를 모델 삼아서 그의 자유분방함을 그림으로 담았다. 하지만 비달리아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둘은 멀어지게 되었다.

사회적 관습은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생애 주기에 따라서 해야 하는 일들(가령, 졸업, 취직, 결혼, 출산, 육아, 승진, 퇴직 등)을 하도록 종용하고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게 만든다. 하지만 젬들은 인간의 생애주기와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생애주기의 사건들을 이루는 것에만 몰두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라면, 젬과 관계 맺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달리아가 젊은 시절 애머시스트와 놀면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그가 생애주기의 사건들을 이루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렉도 비슷한 경우이다. 밴을 타고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CD를 팔던 젊은 그렉은 비치 시티에서 자신의 공연을 보러온 로즈를 만난다. 그리고 로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순회공연을 다니는 삶을 포기하고 아예 젬들이 머무는 신전 앞에 자리를 잡는다.

로즈는 젬들의 임무가 끝난 다음에만 그렉을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렉이 로즈를 좋아하는 마음도 점차 커졌다. 로즈도 그렉을 좋아했지만,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관찰하는 것에 대한 흥미도 강했다. 그래서 로즈를 향한 사랑을 전하는 그렉의 행동과 말을 자신에 관한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인간의 특이성'으로 받아들이고, 귀엽다거나 웃기다고 반응하는데 그치기도 했다.

이들의 대화는 곧 방향을 잃는다. 인간과 젬이라는 근본적인 종 차에서 비롯된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할까. 그렉과 로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혼란 속에 있음을 인정해버린다. 그렉의 사촌인 앤디가 비치 시티를 잠시 방문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다.

앤디는 자기 부모님의 헛간을 무상으로 젬들의 거처로 제공한 그렉에게 화를 내고, 특이한 외형을 가진 이방인인 젬들을 경계한다. 그는 외집단에 극심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보수적인 미국인을 모티프 삼아 만들어진 캐릭터로, 자신의 가족에게만큼은 조건 없는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 조카인 스티븐의 설득으로 마음이 누그러진 앤디는 젬들과 함께 추수감사절 만찬을 준비하는데, 이 과정도 엉망진창이다.

앤디는 젬들이 자신의 추억이 담긴 비행기를 분해해서 그 엔진으로 오븐을 만들어버린 것을 보고 분을 삭이지 못한다. 그리고 젬들은 인간 생애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을 한 자리에서 축하하기 위해서, 앤디의 출생 기념 풍선, 결혼 케이크, 묘비까지 모두 준비한다.

이후 만찬에서 젬들은 기껏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젬들이 지구에서 살아온 역사와 홈월드 문화를 아는 이들만 즐길 수 있을법한 농담을 하면서 대화를 한다. 만찬 장면은 이 시리즈의 주요 캐릭터들이 공유하는 사건들과 문화가 완전히 낯설고 부적절해지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날 처음 젬들을 만난 앤디에게 젬들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답게 이런 상황들을 다소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마무리한다. 우리는 너무 다르고, 함께하면 할수록 어긋나는 지점들이 생기면서 엉망진창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서로 알아가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된다.

이것은 젬들이 퓨전을 하는 방식, 자신을 열어놓고 다른 젬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닮아 있다. 때때로 젬들끼리 퓨전을 시도하면서도 비슷한 종류의 작은 엉망진창이 펼쳐지기도 한다. 페리도트와 가넷의 퓨전 시도가 그러했다. 또한 젬들이 퓨전을 한 상태에서 혼란이 생기면, 퓨전젬이 당황한 표정으로 혼자 문답을 시작하고, 곧이어 퓨전이 풀리면서 젬들이 튕겨나간다. 젬들의 퓨전은 한번 하면, 절대로 풀리지 않는 견고하게 지속되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가넷이 사랑에는 시간과 인내(patience)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괜히 한 말이 아니다.

나는 젬들의 이질적인 행동이나 대사를 보고 젬들이 너무 귀엽고 웃기다고 생각했기에 이 시리즈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로즈가 그렉을 보고 인간이 너무 귀엽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스티븐 유니버스>는 젬들의 이질적인 행동이나 대사를 단순히 웃음 포인트로만 사용하지 않았다.<스티븐 유니버스>의 젬들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생애 주기와 문화를 가진 생명체이지만, 젬들이 인간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과하게 희화화되어서 묘사되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젬들의 행동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도 자세하게 비춰지지 않는다. 오히려 젬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 시리즈에 인간과 다른 젬의 행동과 대사들에 대해서 지나친 웃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면, 이는 젬들을 단지 '웃긴 자들'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젬들에게는 그것이 젬 종족으로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인데 말이다.

젬들은 여전히 귀엽고 더 알아가고싶은 종족이지만, 젬들의 이질적인 행동은 젬 종족이 갖는 일반적 특성을 보여주는 단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젬이 외계 종족으로서 갖는 특성들을 고려했을 때, 그들에게 퓨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티븐 유니버스>가 말하는 화합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가 더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유니버스>의 젬들.

배명훈의 『고고심령학자』는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되는가? : 분석미학적 접근의 시도.

9와 숫자들 디스코그라피 공연: 짧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