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2): 미, 재현, 허구.(23.05.29 책 업데이트)
앞선 글에서는 분석미학의 관점에서 예술에 대해서 제기한 질문들을 정리하고 분류하였다. 분석미학은 예술의 정의, 가치, 해석, 예술에 대한 감정 반응, 예술 작품이 존재하는 방식 등 예술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질문들을 던지고 철학적 관점에서 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하는 것이 분석미학 논의의 전부는 아니다. 분석미학은 이와 더불어 예술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근본적인 개념들에 대해서도 탐구하기도 한다. 이 개념들에 대한 탐구는 결국 예술 현상과 관련된 질문들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앞선 글의 주제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보다 전통적인 주제인 미와 미적인 것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해서, 재현, 허구, 상상, 은유, 창의성과 관련된 분석미학의 주제들과 주요 질문들을 톺아보고자 한다. 이전 글에 비해서 길이가 길어졌는데, 주제가 더 어렵기도 하고, 참고할만한 정보들을 충분히 제공하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미, 재현, 허구를 한 파트로 , 은유, 상상, 창의성을 한 파트로 해서, 두 파트로 진행하려고 한다. 분량은 늘어나도 여전히 간략한 소개에 그친다는 점에서 각 주제에 대한 충분한 소개가 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 (이후에 추가적인 연구와 글을 통해서 더 내 생각을 덧붙일 수 있기를 기원한다.🙏🏻)
🏞 미(beauty)와 미적인 것(the aesthetic) : 분석미학에서 미적인 것은 ‘아름답다’는 것 외에도, ‘조화롭다’, ‘장엄하다’, ‘숭고하다’. ‘고요하다’ 같은 미적 평가를 위한 다른 술어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분석미학에서는 이러한 술어들이 비단 예술 작품에만 적용되지 않으며, 일상의 풍경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실제로 이러한 논의의 씨앗을 제공한 근대 미학자들 또한 예술 작품에서만 미 혹은 여타 미적 특질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일례로, 칸트의 숭고미에 대한 논의는 자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미와 미적인 것에 대한 분석미학의 논의에서 중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예술 작품이건 자연물이건 대상에 미적 술어들을 적용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기준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미적 술어의 적용을 위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각자의 개별적인 감수성 하에서 대상을 아름답다, 숭고하다, 고요하다고 말한다면 미적 평가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규범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어떤 대상에 미적 술어를 적용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보는 입장은 그 대상에 '미적 술어'를 적용하기에 적합한 속성을 실제로 갖는다는 미적 속성에 관한 실재론으로 이어진다. 이 입장에 따르면, 대상에 미적 술어를 적용하는 기준은, 대상이 갖는 미적 속성을 지각하기 위한 일련의 감상의 조건들과 같으며, 미적 판단의 규범성 또한 이러한 조건들에 맞춰서 확보된다. 즉, 모든 사람들이 내리는 미적 판단이 올바른 것이 아니며, 이러한 감상의 조건에 부합하는 미적 판단만이 올바른 미적 판단으로서 규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편, 미적 술어를 적용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고 보는 입장은, 미적 속성에 관한 반실재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기준의 부재-반실재론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반실재론은 우리가 대상에 미적 술어를 적용하는 근거로서 미적 속성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사람들이 특정한 미적 술어를 같은 대상에 적용할지 말지과 관련해서 해소할 수 없는 불일치에 빠진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분석미학의 논의는 20세기 중후반부터는 미적 속성의 존재론적 지위 및 미적 술어의 적용 조건을 중심으로 이뤄져왔지만, 그 이전에는 미적 태도나 미적 경험 등 감상자가 대상을 대할 때의 특별한 태도나 대상에 대한 특별한 경험 자체에 대한 논의가 더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현재에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주제도 시대에 따라서 흐름을 타는 것처럼, 과거에 주류였던 논의가 현대에 언제든지 더 흥미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남아있다.
미와 미적인 것과 관련된 분석미학의 입장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는 『교양인을 위한 분석미학』 (오종환 저, 북코리아) 에서 얻을 수 있다.
『미학의 모든 것』(제럴드 레빈슨 편집, 김정현, 신운화, 신현주, 이종희, 최근홍 역, 북코리아)의 3장과 4장 미적 실재론에서 미적 속성과 관련된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주장과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3장은 실재론 진영에 속한 쟁윌(Nick Zangwill)이 썼고, 4은 반실재론 진영의 벤더(John W. Bender)가 쓴 글이다. 5장 미적 경험 또한 참고할만하다.
벤체 나너이(Bence Nanay)가 저술한 『미학』(박준영 역, 교유서가)은 동시대 분석미학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좋은 미학 입문서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관심사나 목적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 주목’과 시각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감각 양상’들을 미적 경험의 중요한 특성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저자의 미적 경험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 서적이기도 하다. 특히 주목과 지각과 관련된 심리학의 논의가 어떻게 미적 경험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지를 쉽게 안내하고 있다.
🪞재현(representation) : 심리철학에서는 representation은 '표상'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인간이 감각한 세계의 현상이 인간의 정신에서 '상'으로 맺힌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representation은 '다시'라는 의미의 're'와 '제시한다'라는 의미의 'present'가 합쳐져서 생겨난 represent의 명사형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주 직관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석미학, 예술철학 분야에서는 특별하게 심리철학적인 맥락이 언급되지 않는 이상, representation은 재현으로 번역되고, 이 때의 재현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갖는 특징, 즉 세상의 모습을 예술적 매체를 사용해서 나타내는 특징으로 이해된다.
전통적으로 흔히 재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장르는 내러티브가 있는 소설, 연극, 영화 등이며, 구상 회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비교적 현대에 나타난 예술 장르인 추상 회화나 내러티브가 없는 현대적인 소설에서는 그 작품이 묘사하는 세상의 모습이 무엇인지 한 눈에 알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장르의 작품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고 있으며, 그 세상의 무언가에 '관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러시아의 절대주의 회화가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담지한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알 수 있다.) 즉, 모든 예술 장르는 사용하는 예술적 매체나 구현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재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석미학에서는 회화, 그 중에서도 구상적인 회화를 중심으로 예술의 이러한 재현적인 성질에 관한 논의를 해왔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그린 매우 사실적인 초상화나 사과를 그린 선드로잉을 보고, 그 초상화가 여왕을 재현한다거나 그 그림이 사과를 묘사한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얼굴을 알고 있거나, 사과라는 과일의 생김새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이 그림들에서 여왕의 모습과 사과의 형태를 '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상적인 회화에서는, 그림에서 여왕의 모습을 사과의 형태를 보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림이 여왕/사과를 재현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도 있다. 구상적인 회화가 세상을 재현하게 되는 방식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별로 논의할 것이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분석미학에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재현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 구상 회화가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닮음의 문제가 아니라,관례와 관습의 문제라고 주장한 굿맨(Nelson Goodman), 구상 회화의 재현성은 회화가 재현하는 대상과 실제 대상 사이의 가림 형태(occlusion shape)의 닮음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한 홉킨스(Robert Hopkins), 구상 회화의 재현성은 감상자에게 그림 자체(ex.캔버스에 묻은 물감 자국)를 보는 것과 그림이 묘사하는 대상을 보는 이중적인 경험인 '안에서 보기'(seeing in)라는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볼하임(Richard Wollheim), 구상 회화의 재현성은 감상자가 회화가 갖는 지각적 특징들을 그것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 재인(recognize)하는 것에 있으며, 이 때 재인 능력은 특정 양식의 회화가 대상을 묘사하는 관습에 대한 이해도 포함한다고 주장한 로페스(Dominic McIver Lopes). 이러한 다양한 입장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구상 회화가 어떤 의미에서 재현적인지와 관련해서도 여러 설명이 가능하며, 구상 회화에서 대상을 보는 것의 자연스러움이 구상 회화의 재현성과 관련된 논의가 불필요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논의는 전형적인 재현성에서 벗어나는 현대적인 예술 장르의 재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예술의 재현성이 전통적인 장르의 재현성으로부터의 의도적인 탈피를 통해서 성립한다면, 구상 회화의 전형적인 재현성에 대한 이해를 현대적인 예술 장르의 재현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재현과 관련된 분석미학의 이론들에 대한 개괄은 『미학이 재현을 논하다』 (오종환 외 지음, 서울대학교 출판 문화원) 1장의 논문들에서 얻을 수 있다.
🧝♀️허구(Fiction) : 허구성 또한 재현성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갖는 중요한 속성처럼 간주되어 왔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이 예술의 한 장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픽션'이라는 장르가 갖는 특성으로서의 허구성이 미학이 탐구 주제가 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술 작품들이 어떤 의미에서 허구적이라고 불리는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후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등장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령 유니콘이 등장하는 작품이나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묘사한 비극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리더라도, 그 인물의 삶을 재구성해서 묘사하는 경우도 회화의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루벤스는 프랑스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 속의 중요한 사건들(남편인 헨리 8세와의 만남과 결혼, 왕직의 수여)들을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가호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묘사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등장시켜서 고루하고 정치적인 왕실 에피소드에 상상의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왕가라는 허구적 사실을 강조해서 왕가의 위엄을 강조한 것이다. 이보다 조금더 일상적인 사례를 찾자면, 만평에서 정치인을 풍자할 때, 그의 외양상의 특징 혹은 정치적인 성격을 더 강조하려고 그를 동물로 혹은 특정한 허구적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어떤 허구적 요소를 도임함으로써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속성들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즉, 가공의 인물이나 꾸며낸 사건이 등장할 때 뿐만 아니라, 실제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허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꾸며낸 사실, 가공의 인물이 포함된다는 것만으로는 작품을 허구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위의 언급만으로도 허구성이 충분히 소명된다면, 작품이 허구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도 얕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허구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허구성을 가공의 요소가 포함된다는 것 이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서 월튼(Kendall Walton)은, 어떤 대상이 믿는 체 하기(make-believe) 놀이의 소도구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허구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믿는 체 하기 놀이의 사례는 어린 아이들의 소꿉놀이이다. 요즘은 말 장난감은 더 정교하겠지만 옛날의 장난감 목마(hobby horse)는 말의 머리가 달려있는 기다란 막대였다. 어린 아이들은 이 목마에 올라타서 말을 타는 시늉을 하면서 놀 수 있다. 장난감 찻잔 세트에는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그 무엇도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아이들은 차를 따르고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논다. 정교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도 아이들은 주변의 자연물을 장난감 삼아서 어떤 사람이 된척, 어떤 행동을 하는 척 놀이를 하곤 했다. 이러한 놀이에는 일종의 상상이 포함되는데, 월튼은 믿는 체 하기 놀이의 소도구가 됨으로써 놀이에 참여하는 이들이 상상하게 유도하는 것이 허구적인 것에 필수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허구적인 예술작품에도 이어지는 특징이라고 보았다.
커리(Gregory Currie)는 허구적인 작품이 상상을 유도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직품이 허구를 만들겠다는 실제 제작자의 의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추가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이 때의 제작자의 의도는 감상자가 이 작품의 내용을 믿는 체 (상상) 할 것이라는 의도이다. 커리는 이러한 의도가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장르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같은 논픽션의 경우, 제작자는 이 작품의 내용을 감상자가 믿기를 의도한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소설이나 영화 등과는 다르고 주장한다.
매트래버스(Derek Matravers)는 특이하게도 픽션과 논픽션의 장르 구분을 거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유의미한 구분은 어떤 것을 우리가 직접 면대면으로 마주하는지(confrontation), 아니면 사건을 재현하는(representation) 어떤 매개를 거쳐서 경험하는지 여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중 한 가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고 해도 우리가 그를 면대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추가 조사를 통해서 그 작품이 다뤘던 사건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하는지 알게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매트래버스는 사람들이 재현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마주한 경우, 보통 그에 대해서 행동을 통해 개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매트래버스는 '특정한 방식의 매개', '행동의 불가능성' 등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다른 구분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통의 특징들을 제시하는데, 이 특징들이 과연 이 경계를 허물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것인지는 흥미로운 논의 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술 작품이 갖는 특징으로서의 허구성을 중심으로 논의들을 소개했지만, 언어철학과 형이상학에서는 '허구적 이름(ex. 셜록 홈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며, 그러한 이름을 포함하는 문장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 '셜록 홈즈라는 허구적 개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같은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졌다. 물론 위에서 소개한 학자들도 이러한 논의를 인지하고 이 문제들을 자신의 허구 이론에서 다루기도 한다. 실제로 앞서 살펴본 월튼은 상상적 저항의 문제, 사진의 투명성과 관련된 미학적 저술도 남겼지만, 철학에서는 허구적 이름의 지칭과 그러한 이름을 포함한 문장의 의미론과 관련해서 더 유명한 학자이기도 하다.
월튼의 저서는 비교적 최근에 번역본(『미메시스: 믿는체하기로서의 예술』, 양민정 역, 북코리아)이 출간되었다. 분량과 내용은 만만치 않지만, 허구에 관한 월튼의 주장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있기에 월튼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의 가치가 있다. (다음의 브런치 글 “허구란 무엇인가? 월튼의 허구 이론”도, 월튼의 허구에 관한 이론에 대한 좋은 입문을 제공한다. https://brunch.co.kr/@wannabephd/31 )
『미학의 모든 것』(제럴드 레빈슨 편집, 김정현 외 역, 북코리아)의 21장 허구에서는, 허구 개념에 관한 예비사항에서 출발해서 허구적인 이름과 허구적 개체의 존재 방식의 문제, 허구의 역설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이 글에서 다소 미진하게 다루었던 허구적인 이름과 허구적 개체의 존재 방식의 문제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이 글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