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유니버스>의 세계
* 일부 에피소드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
**출처가 따로 표기되지 않은 이미지들은 스티븐 유니버스 채널, 카툰 네트워크 아시아, 카툰 네트워크 오스트레일리아 등 공식 채널에 업로드된 클립 영상들에서 갈무리함.
<스티븐 유니버스>: 간단한 소개
지난 봄에 <스티븐 유니버스>의 시즌 피날레 에피소드를 보았다. 5년 이상을 비치시티(작중 배경인 가상 도시)와 함께해온 팬의 입장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는 꽤 뭉클하기도 하였다. 나는 시리즈물에서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다정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스티븐 유니버스>는 나의 그러한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곱씹을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젬(Gem) 사회의 구조, 젬 종족의 본성, 지구와 젬 사회의 관계 같은 세계관의 설정도 제법 탄탄하다. 주연인 크리스탈 젬 일행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나름의 캐릭터를 부여해서 시리즈 내에서 적절히 다루는 세심함도 좋았고, 비치 시티의 여유롭고 평온한 분위기도 좋았다. 배경 작화와 상황에 걸맞게 깔리는 배경 음악도 좋아했다. (캐릭터들이 에피소드에서 직접 불렀던 노래들도 좋다. 나는 뮤지컬 드라마에서 노래가 끼어드는 타이밍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이 시리즈에서는 그런 노래들이 많지 않았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국내 및 해외에서 열성팬들을 중심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스티븐 유니버스>의 인기를 분석하는 기사들은 주로, 스티븐의 성격, 젬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 맺음의 양상들을 통해서 퀴어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언급한다. 스티븐은 보통의 소년 히어로 답지 않은, 비폭력주의와 적에 대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젬 종족은 설정상 성별이 없는 종족인데, ‘she’, ’her’등의 대명사로 지칭된다. (제작자인 레베카 슈가는 젬 종족을 젠더가 없는 여성-nonbinary woman-으로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젬들은 다양한 성격과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젬들이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이 변할 때 마다 외형도 함께 변한다. 예를 들면, 젬들이 젬 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외형의 색이 비슷한 톤으로 맞춰져 있고, 의복도 특정 유형의 젬이 입는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젬 사회에서 벗어나서 지구로 온 젬들은 주변의 환경 및 타인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을 더 다양한 색깔로 채우고 의복의 종류도 더 다양해진다.
서로를 어느정도 이해하는 젬들은 서로가 원할 때 ‘퓨전’(fusion)을 하기도 한다. 보통은 함께 춤을 추다가 몸이 빛나면서 합체하는데, 퓨전 이전 젬들과는 또 전혀 다른 외형과 성격을 지닌 또다른 젬이 등장한다. 퓨전 젬은 기존 젬들의 기억과 경험을 모두 보유한 새로운 인격체이다. 이런 요소는 팬들에게 얘랑 얘가 퓨전하면 어떤 젬이 나올까? 상상하는 재밋거리도 제공한다.
소년 히어로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이 정도의 설정들을 치밀하게 신경 쓴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러한 제작진의 정성에 사람들은 이 시리즈를 소중히 여기는 팬덤이 되는 것으로 답한다.
<스티븐 유니버스>가 그리는 퀴어 결혼식
많은 <스티븐 유니버스> 팬들이 퀴어 재현과 관련한 기념비적 에피소드로 꼽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루비와 사파이어의 결혼식이다.
다소 터프하고 남성스러운 외양을 갖춘 캐릭터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성스러운 외양의 상대방이 턱시도를 입은 결혼식은 시각적인 전복의 효과를 노린 것일테다. 물론 루비와 사파이어가 어떻게 관계를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단순히 시각적 전복에서만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홈월드(젬들의 세계)의 설정 상, 루비와 사파이어는 젬 사회에서 하는 역할과 계급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서도 안되고 퓨전도 해서는 안된다. 루비는 높은 계급의 젬들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고, 사파이어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는 젬으로,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호출되는 높은 계급의 젬이다. 홈월드에서 퓨전은 같은 종류의 젬들이 그 젬이 갖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계급 상 차이가 있는 젬들, 다른 종류의 젬들 사이의 퓨전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퓨전을 한 젬들은 ‘끔찍한 존재’로 간주되고, 처벌을 받는다. 루비와 사파이어가 처음으로 가넷으로 퓨전했을 때, 주변 젬들이 보였던 반응도 놀라움이 뒤섞인 혐오에 가까웠다.
젬들은 설정 상 성별이 없지만, 외형적인 스타일(부치의 외형을 지닌 젬에서 여리여리한 외형의 젬까지 다양함)과 여성대명사로 지칭된다는 점 때문에, 젬들의 관계는 현실 퀴어 여성들의 관계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젬들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검열당하기도 했다.
루비와 사파이어는 그 중에서도 공공연한 연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에 대한 다른 젬들의 시선은,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정체화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무지와 그로 인한 혐오로 흔히 읽힌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루비와 사파이어의 결혼식 장면은 편견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애정 관계를 유지했을 때의 결실을 보여준다. 즉, 루비와 사파이어의 결혼식 장면은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아닌 커플,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었던 사랑이 축복받는 모습을 상징한다.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것
그렇지만 루비와 사파이어는 외계문명에서 온 젬이고, 애초에 결혼이라는 관습 자체를 욕망할 리 없다. 결혼식을 제안한 것은 스티븐이고 이를 기획한 것도 스티븐이다. 루비와 사파이어에게 결혼식이란 홈월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둘의 결합(가넷이 됨)을 기념한다는 의미 그 이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렇지만 스티븐의 입장에서는 결혼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스티브와 코니도 루비와 사파이어와 마찬가지로 시리즈의 공식적인 커플이다. 코니는 여자아이고 스티븐은 남자 아이이지만, 스티븐과 코니가 각각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 스티븐은 젬인간이고 인간이 갖지 않은 특성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평범해보이는 이 커플도 퀴어라고 할 수 있다. (퀴어를 성정체성이 아닌 어떤 측면에서든 표준에서 벗어났음을 일컫는 말로 넓게 이해한다면.)
스티븐은 시리즈 내에서 분장을 하고 치마를 입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싸울 때에도 칼이나 활 같은 무기를 소환하지 않고 방패만 소환한다. 오히려 검술 훈련을 받아서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추게 된 쪽은 코니이다.
<스티븐 유니버스>의 에필로그 시즌으로 나온 <스티븐 유니버스 퓨처>(이하 <퓨처>)에서 스티븐은 코니에게 청혼한다. <퓨처>는 홈월드와 크리스탈 젬 사이의 분쟁이 완전히 끝난 3년 후의 비치 시티를 배경으로 한다. 비치 시티는 젬들과 인간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고, 더 이상 홈월드 젬들의 지구에 대한 위협은 없다. 서사의 클리셰에 따른다면, 시즌 내내 이어져온 전투 속에서 함께 싸우면서 서로를 챙겨주었던 커플에게는 이제 행복한 앞길이 펼쳐져야 하는, 그러한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즉, "Happily Ever After"의 세계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요 커플의 결합 혹은 결혼이 소설이나 영화의 결말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모든 분쟁이 마무리된 후, 스티븐이 코니에게 청혼했다는 점은 꽤 전형적인 요소로 느껴진다.
<스티븐 유니버스> 시즌 1의 에피소드인 "Open Book"에서 스티븐은 코니와 함께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전형적인 결말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티븐은 소설의 주인공이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와 결혼하는 결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주인공 일행이 서로를 아껴주는 다정한 분위기에 몰입하고, 그들의 결혼식 장면을 묘사하는 작은 디테일들도 좋아했다. 스티븐에게 결혼이란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 연인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단단하게 묶어서 'Happily Ever After'의 세계로 밀어넣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퓨처>에서 스티븐은 자신의 취향을 한껏 담은 작은 세트장을 만들어서 코니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한다. 그 당시 스티븐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결말을 완성하는 것,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을 또다른 정체성으로 바쁘게 밀어넣는 것보다, 시리즈 내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왜곡된 방향으로 고착되어 버린 자신을 돌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티븐 자신도, 스티븐의 아빠도, 주변의 다른 젬들도 그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루비와 사파이어 커플을 제외하고는 이 시리즈의 다른 퀴어 커플들은 한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려는 모습을 보인다. 스티븐은 <퓨처>에서 코니와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느끼는 박탈감을 해소하려고 했다. 또다른 퀴어 커플인 로즈나 펄의 관계 또한 ‘압도적인 매력을 가졌다고 믿은’ 상대방에게 다른 캐릭터가 빠져들게 되면서 형성된 관계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잊거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서 이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계속해서 이러한 이유로 유지되고 강화된다면, 이는 건강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나는 펄의 로즈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펄은 로즈가 스티븐에게 형체를 주고 사라진 이후에도 로즈의 존재에 매달리고, 펄이 다른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도 로즈를 매개로 결정된다. 펄은 스티븐 안에 로즈가 있다고 생각해서 스티븐을 로즈라고 부르기도 했고(시즌4 "Three Gems and A baby"; 과거 회상 에피소드), 자신이 로즈를 호위했듯 코니에게 스티븐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기려고 했다. (시즌2 "Sworn to the Sword") 그리고 그렉이 로즈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고 서먹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했다.(시즌3 "Mr.Greg") 그러나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서 펄도 자신의 정체성을 로즈를 매개로 규정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외형 변화로 드러난다. 시즌 마지막에 등장한 펄의 새로운 의복(재킷과 청바지)은 펄이 시즌 내내 고수해왔던 하늘하늘한 의상과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펄이 로즈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기를 멈추고, 다른 젬들 나아가 인간들과도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티븐 유니버스>가 말하는 사랑
이 시리즈가 젬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보았을 때, 퀴어의 삶에 필요한 사랑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는 자신이 뭘 느끼는지, 그리고 뭘 바라는지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올바른 사랑이다. 사실 <스티븐 유니버스> 시즌 1에서 사파이어와 루비가 퓨전한 가넷이 “Stronger Than you”라는 노래를 통해서 이러한 사랑의 힘에 대해서 노래한 적 있다. 이 노래는 가넷과 재스퍼의 전투 장면에서 삽입되었는데, 재스퍼가 퓨전은 약한 젬들이 더 강해지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조롱하자 그에 대한 답으로 들려준 노래이다.
가넷은, 자신을 갈라놓을 때 마다 더 새로운 모습으로 뭉치게 해주는 것, 단순히 두 명의 힘을 더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랑은 홈월드의 체계와 규칙에서 벗어난 루비와 사파이어가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된다.
어떤 관계가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방에게서 채우기 위한 관계라면 혹은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러한 관계는 길게 유지되지 못한다. 상대방이 더 이상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할 정도로 달라진 경우, 혹은 상대방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경우, 그 관계에 쏟아 부은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후자의 관계,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유지되는 관계의 모습을 라피스와 재스퍼의 퓨전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라피스는 홈월드 젬이지만, 우주를 여행하다가 크리스탈 젬이라는 오해를 받아서 거울 속에 갇힌 채 수천년을 살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수천년을 보낸 라피스는, 나중에 스티븐의 도움으로 거울에서 풀려나서 홈월드로 가지만 크리스탈 젬의 정보원 취급을 당하게 된다. 그는 결국 재스퍼와 퓨전해서 바닷속에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내린다.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에서 인정받은 경험이 없는 라피스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젬과 관계맺어서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선택을 내린다.
한 사회에서 퀴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가 ‘표준’으로 간주하는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의 몸, 자신의 감정과 사고가 끊임없이 어긋나는 것,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어떤 면에서 부적합하다는 인지가 있다면,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라피스처럼 파국적인 관계를 맺게 되기도 한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관계는 비단 온전한 형태를 가진 젬들 사이의 관계로 한정되지 않는다. <스티븐 유니버스>에는 오염된 젬(corrupted gem; 젬의 일부가 변형되어서 온전한 인격체로 구현되지 않는 젬)들과 클러스터(cluster; 산산조각나서 아예 인격체로 구현되지 않는 젬 조각들의 덩어리)도 등장하는데, 크리스탈 젬과 스티븐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 또한, 나와 너무 달라서 이해가 어려운 존재와 관계 맺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스티븐 유니버스>의 많은 에피소드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 나의 삶과 내가 관계맺은 다른 이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힘껏 사랑하는 것이 퀴어에게 필요한 사랑임을 암시한다.
<스티븐 유니버스>가 끝난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도 나는 이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제각각의 약점들과 문제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인간과 젬들, 완벽하지 않은 이들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보듬어주는 세계, 그 세계가 말하는 사랑. 비치 시티에서 젬들이 각자의 바이브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평안해진다. 마무리는 영업멘트이다. 시즌이 많지만, 1회 10분이고, 저녁먹을 때 2회씩 보면 1년 안에 끝납니다. <스티븐 유니버스>를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