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서 배경의 역할에 관한 짧은 글.

* 이 글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들은 카툰네트워크 유튜브 채널들과 넷플릭스 유튜브 채널에서 갈무리했습니다.

<스티븐 유니버스>가 배경을 구성하고, 채색하는 방식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특히 시간대에 따라서 하늘에 다른 색조가 입혀지는 것이 좋았다. 해질녘 즈음에는 옅은 분홍색이 때로는 주황색과 노랑색이 드리워지고, 늦은 오후 시간대의 하늘에는 옅은 푸른색과 노란색 햇살이 뒤섞여 있다. 도시의 밤하늘은 보랏빛이 감돌고, 바다 근처의 밤하늘은 짙은 남색이다.

밤하늘과 해질녘 하늘은 굳이 다른 색을 써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 밤이 도시의 밤인지 바다의 밤인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짙은 남색을 쓰면 된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얼마나 넘어갔는지와 상관없이, 해질녘이면 하늘을 주황과 노랑 계열의 색으로 칠하면 된다. 그 정도만 묘사해줘도 사람들은 지금 이 장면이 어떤 시간대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 유니버스>는 왜 다양한 색을 써가면서 배경 묘사에 공을 들이는 것일까?

미리 만들어진 배경 템플릿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애니메이션 배경 작가들은 스토리보드가 대강 만들어져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가 결정된 다음에 배경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방영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배경 작업 시간이 촉박한 편이다. 배경의 디자인과 선 작업이 끝나고 난 다음에 채색 작업을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애니메이션 제작의 가장 마지막 단계 활동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하늘의 색들을 고정해놓지 않고 다양하게 했던 이유는, <스티븐 유니버스>아트북 Art & Origins 에서 제작자가 밝혔듯, 색이 분위기를 살려주고, 장면의 구성을 더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한 장면을 하나의 감상할만한 구성으로 만들려면, 매번 같은 색을 써서는 안된다. 그 장면의 분위기를 살려줄 만하면서도 작품의 시간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충돌하지 않는 색들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한낮에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하는 중이라면, 그 사건이 낮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모순되는 색으로 하늘을 칠해서는 안된다. 하늘의 색이 갑자기 바뀌는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시간이 흘렀다거나, 날씨가 변했다거나 아니면 하늘의 색을 바꿔놓을 만한 어떤 인공적인 요소가 등장했다거나. <스티븐 유니버스>에서는, 홈월드의 우주선이 비치 시티에 방문하는 에피소드에서, 우주선이 내뿜는 빛의 색에 영향을 받아서 하늘의 색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바로 인공적인 요소의 개입으로 하늘의 색이 바뀌는 경우이다.

날씨가 흐려지거나 비가 와서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경우는, 날씨를 활용해서 에피소드의 분위기를 살리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시즌 1의 기괴한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Frybo”에서는, 에피소드 시작할 때부터 날씨가 맑지 않다. 이후 날씨가 점점 더 흐려지면서 배경이 탁한 색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후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감자튀김을 먹이는 인형의 광기를 부각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시즌 2의 “When it rains” 나 시즌5의 “Pool Hopping”에서는 비가 내리면서 작중 캐릭터가 뭔가를 깨닫는데, 이처럼 ‘비'라는 사건이 스토리의 전개나 캐릭터성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들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날이 흐리기도 하고, 맑은 하늘로 시작했어도 점차 회색 구름이 하늘에 끼는 것을 보여주고 에피소드 중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만약 이 에피소드들이 처음에는 맑은 하늘로 시작했다가, 에피소드 중간에 우렁찬 천둥소리를 신호로 갑자기 구름이 드리우고 비가 내리는 연출을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연출은 만화적으로 허용될 수도 있지만, <스티븐 유니버스>는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색 변화, 날씨의 변화에 있어서는 그러한 만화적인 연출을 잘 사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스티븐 유니버스> 속 지구의 환경이 우리가 사는 지구와 특별히 다르다는 설정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구에 드리우는 햇빛의 양과 색에 차이가 있고, 밤이 되면 사람들이 보통 인공조명을 켠다는 것은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은 대체로 구름이 껴있고 날씨가 흐리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전문적인 개념을 써서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세계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장소에 드리우는 빛의 양과 색이 변한다는 것, 날씨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은, 이 세계에서 성립하는 ‘허구적 참’(fictional truth)이라고 할 수 있다. 허구적 참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작품을 보는 사람이 상상하는 작품 속 세계에 관한 사실이다.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대사는 애니메이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풀려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건에 대해서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관한 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배경의 변화도 허구적 참을 발생시킬 수 있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만화적 연출을 사용해서 극적으로 하늘의 색을 바꾸는 대신, 시간의 흐름 혹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하늘의 색을 바꿈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애니메이션 속 세계의 자연적 법칙에 대해서 상상하게 한다.

한편으로, 홈월드 우주선의 등장으로 인해서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것은, 이 세계의 환경이 어떤 불가사의한 힘의 작용으로 인해서 자연법칙과 상관없이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과거에 지어진 젬 건축물이 남아있어서 젬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장소들에서는, 신비롭고 마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깔들이 조합된 하늘이 등장하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이나 날씨 변화, 혹은 미지의 요인으로 인한 하늘의 색 변화는 눈에 잘 띄지는 않을 수 있지만, 캐릭터들이 살아가는 애니메이션 세계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려진 프레임 너머의 세계의 모습을 구축하고 상상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한편, <스티븐 유니버스>는 젬이라는 외계 종족이 나오는 우주물이고 따라서 지구의 하늘뿐만 아니라 우주를 배경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지구에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몇몇 에피소드들은 달 기지(Moon base)나 인간 동물원(Human Zoo), 홈월드나 미지의 행성 같은 우주의 공간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배경이 우주로 등장하는 첫 에피소드는 시즌 1의 “Ocean Gem”인데, 비치 시티의 사라진 바다를 찾아가는 길도, 바닷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물기둥과 그 물기둥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우주의 모습도 너무 아름다웠던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스티븐 유니버스>에는 우주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홈월드와의 갈등이 스토리의 주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우주로 간다고 해도, 달기지나 인간 동물원 처럼 젬들과 관련된 공간들을 방문하는 것에 그친다. 젬 외의 다양한 외계 종족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문명을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우주를 어떤 곳으로 그리고 있는지를 상상하기 위한 재료들은 다소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랬을까. <스티븐 유니버스>가 종영한 후, 우주를 배경으로 삼고 외계인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새로 나오면 때때로 챙겨 봤다. 그중 하나인 <우주 히어로 키드(Kid Cosmic)>는 인구 밀도가 극도로 낮은 미국 중부 사막 지역에 사는 키드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키드가 우주에서 온 다섯 개의 파워스톤을 발견하면서, 외계인들과 얽히기 시작하는 것이 이 스토리의 출발점이다. 이 시리즈는 옛날 만화책의 그림체와 채색법을 살려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이 점에 가장 눈길이 갔다. 투박한 펜선이 살아있는 그림체랑 그와 잘 어울리는 건조하고 크런치한 사운드의 록 음악(멋진 기타 솔로와 하모니카!)이라니! (사운드 트랙 듣기🎧) 이 시리즈에 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시리즈의 배경과 그 배경이 우리에게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지를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주 히어로 키드>의 시즌 1은 사막에서의 사건들을 다룬다. 그렇기에 낮에는 배경 자체가 사막의 모래 언덕과 바위들이 반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밤에는 실내 장소나 가로등 주변처럼 빛의 영향 하에 있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배경이 검고 푸른 어둠 속에 잠기면서 한낮의 노랗고 붉은 사막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 시리즈에는, <스티븐 유니버스>와 달리, 특별히 시간이 흐르는 양상을 배경 변화를 통해서 공들여서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그렇기에 <우주 히어로 키드>의 세계는 실제 세계의 자연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으려고 한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세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을 한 것에는, 드로잉 같은 배경, 거친 윤곽선, 자전거 타기 같은 반복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게 뚝뚝 끊긴다는 점, 외계인 군단이 거의 복사 붙여넣기한 것처럼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 등이 한 몫했다.

아마 <우주 히어로 키드>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재료는 미국 히어로 만화책들이 그리는 세계일 것이다. <우주 히어로 키드>의 세계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 세계의 법칙들을 깨는 다른 히어로들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자신의 능력을 능숙하게 잘 사용하지 못하는 주인공 소년, 3-5세 사이의 유아, 노인, 고양이, 십 대 소녀로 이루어진 로컬 히어로 팀, 어설픈 외계인 빌런들, 주인공 일행이 자신들이 사는 사막 지대를 벗어나지 않고, 그 언저리를 배경으로 활동한다는 점 등등은, 남성이자 백인인 영웅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강한 힘을 가진 사악한 외계의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히어로물의 설정을 뒤집는다. (시즌 2에서는 사막의 작은 마을 일부가 우주로 이동하면서 은하수와 성운, 외계의 행성, 거대한 우주선, 우주 격투장 등으로 배경이 확장되긴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어로 세계관의 설정을 뒤집는 전개는 계속되고, 그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은, 바로 식당인 ‘모의 오아시스’이다. 어떤 지점에서 그러한지는, 글을 읽는 분들도 이 시리즈를 보고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

애니메이션 배경의 디자인과 그것의 변화 양상은, 전경에서 펼쳐지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이나 대사보다는 상대적으로는 덜 주목되는 요소이다. 처음 볼 때는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니까, 전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만 주목하곤 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문득 배경의 디테일들에 눈길이 갔던 순간이 있었고, 그런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보기 위해서 멈춘 적도 있었다.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 사건들의 주요한 배경이 어디인지, 그리고 이 배경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러면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는지 또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세계를 더 풍성하게 상상하기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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