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론의 순환성(분석미학 비판?)’에 대한 리뷰. (feat. 팩토리 리뷰)

글쓰기 모임 '팩토리'

대학원에서 수업이나 세미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모이고 해치고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 1년 넘는 시간 동안 참여한 글쓰기 모임이 있다. 같은 과 대학원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고, 선생님은 없다. 달력에 모임 날짜를 표시해 놓은 것을 세어보니, 대략 1년 5개월 정도되는 기간동안 28번 만났다! 잦은 빈도로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스터디 모임만큼 횟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의 한달을 매일 보는 것에 가까운 횟수이다 보니, 무언가를 이룬 것 같다는 고무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래는 실제로 홍보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려고 만든 것이다.

비록 지금은 3주에 한번 하고 있지만..

비록 지금은 3주에 한번 하고 있지만..

지난 1년 간 내가 어떤 글들을 가지고 갔는지 되돌아보았다. 학술지에 제출하는 논문을 조금씩 만들어서 가져간 적도 있고, 한학기를 마감하면서 쓴 기말 페이퍼를 가져간 적도 있고, 어디에 제출할 연구 계획서, 학위논문 혹은 학술지 논문 목차와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들을 가져간 적도 있다. 작년에는 대부분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간 것 같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가지고 가기도 했는데, 대학원 생활에 관한 글, 내가 본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 관한 글도 가지고 갔다. 올해에는 이런 글들을 조금씩 만들어서 들고 갔다. 애초에 글의 종류나 분량이 아주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모임을 처음으로 만들 때 했던 생각은, 글을 통해서 내 의견이나 관점을 제시하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조금 더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운용하기 위해서 애썼다.(성공했는지는..?) 나보다 더 배운 사람에게 글을 검사받는 자리, 내가 미처 고치지 못한 글의 사소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지적당하는 자리가 아니라, 글로 자신의 관점을 개진하고, 이 관점 자체에 관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생산적인 질의 혹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랐다.

앞으로 이 모임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같은 과, 같은 학교라는 공통의 베이스를 갖고 있었지만, 수료, 졸업 등을 이유로 베이스로 삼는 영역이 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야 어디든지 학교를 베이스로 삼아서 살아가겠지만, 수료한 다음에는 학위 논문이나 학술지 논문 외에는 다른 종류의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모임의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기왕 1년 넘게 했으니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최근 모임의 동료가 쓴 글에 대한 답글(?)을 남겨보려고 한다.

예술 이론으로서의 미학.

동료의 문제의식은 '예술 이론'으로서의 미학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예술 이론으로서 미학에 적합한 방향성, 언어, 이론의 성립 조건 등을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을 피해왔다. 내가 다루기에는 조금 큰 주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주제 자체도 메타적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이론적 문제 의식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피해왔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 주제를 다룰 만큼의 용기가 생긴 것은 아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다른 연구자가 쓴 글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더 큰 계기가 되었다. 사실은 그냥 답글 쓰는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동료가 쓴 글은 여러 편이 있지만, 그 중 일부, 내가 전공하는 분석 미학의 기본 정신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만 답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동휘 "예술 이론의 순환성 (분석미학 비판?)" https://donghwilee.com/13826 현재는 공개되어 있지 않은 글이다.)

내가 이 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 한 가지는 이 글의 분석 미학 비판 근거는 분석 미학의 기본 정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오해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분석 미학의 기본 정신과 관련된 생각을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분석 미학 비판의 근거.

이동휘는 분석 미학 비판의 근거를 멜러(D.H.Mellor)가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에서 분석 철학의 기조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 "철학적 분석은 사태가 일으키는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킬 지적 스프링클러"여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에서 얻는다. 분석 철학의 이러한 기조는 철학적 분석과 개념 분석을 주요 방법론으로 삼는 분석 미학에도 이어진다는 지적은 정확한 관찰이다. 하지만 분석 미학이 추구하는 이러한 기조는 이동휘가 다른 글에서 주장해온 예술 이론의 특징, 예술 이론은 예술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분명하게 만들고 명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이다.

그 이유는 예술 이론의 설명항인 예술 작품, 예술 제도 등은 개념과 이론을 동원해서 분명하게 해명될 수 있는 객관적 사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에 관한 다른 글(이 글들도 현재 공개X)에서 쓴 이동휘의 말을 내가 이해한대로 쓰자면, 예술 작품은 작가가 어떤 소재를 예술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따라서 재현하거나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갖기도 하며, 어떤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문화적 기호로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의미도 가질 수 있는 인공물이다. 즉, 작품은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런 의미들은 작품을 '보이는 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되는 것', '해석적 작업이 필요한 개념적인 무언가'로 만든다. 예술 제도 또한, 작품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연물이 아니라,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이들이 예술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양태가 달라지는 인공물이다. 예술이 예술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의존해서 성립한다는 것은, 예술이 예술 이론의 전개에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다는 점을 함축하기도 한다. 아마 이 점이 이동휘가 "예술이론의 순환성"에서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말을 빌려서 주장하고자 한 바일 것이다. 이처럼, 예술 이론이 대상으로 삼는 현상 자체도 개념 및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예술 이론은 애초에 예술 현상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그 현상과 가장 잘 부합하는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동휘의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먼지를 진정시킬 스프링클러"가 되길 희망하는 분석미학은 예술 현상을 명료하게 설명하겠다는 기조를 내세우면서 꿋꿋이 나아가고 있으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동휘는 분석 미학도 그런 기조를 겉으로 추구할 뿐 예술 이론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이론적 모호성'과 남몰래 손잡고 있다는 진단을 제시한다.

나는 분석 미학이 예술 현상에 더 부합하는 해석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진 않고, 분석 미학의 이론들이 예술 현상들을 더 깔끔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다른 예술 이론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론이 실제 사례들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긴 했다. 그래서 이러한 진단에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분석 미학이 예술 현상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면, 이 비판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도 함께 들었다. 하지만, 분석 미학이 그러한 목적을 갖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에는 이를 전공하는 나의 책임도 있다. 분석 미학 전공 소개글에도 "예술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목표로 한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나도 그 구절을 다른 글에 버젓이 옮겨 놓기도 했다. 그러니, 분석 미학이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에 잘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일종의 검증가능한 과학적 이론이 되길 희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제와서 이런 오해를 조금이라도 시정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석 미학 연구자들이 마냥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을 슬쩍 얹어보는 것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

내가 볼 때 이런 오해에 기여하는 또다른 요인은 분석 미학자들이 경험과학의 연구 결과들을 활발히 수용해서 연구하는 경향성도 있을 것이다.(이러한 경향성은 분석 철학에서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분석 미학이나 분석 철학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설명이 경험 과학 이론이 추구하는 설명과 비슷하다고 본다면, 거기에는 모종의 비약적 사고가 있다. 멜러가 철학적 분석에 대한 위의 표현을 통해서 강조한 바는, 그것이 "사태가 불러일으킨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사태가 불러일으킨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키는 일"은 사태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거부.

사태가 불러일으킨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킨다는 것의 의미는 사태 자체보다는 그 사태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하기 방식, 그 사태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를 분석을 통해서 분명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개념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사태에 잘 부합하는 설명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말이 그 말이 향하는 사태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사태에 대한 더 정확하고 올바른 그림을 가질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에는 값이 따른다. 개념 분석을 통해서 사태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공하겠다는 야심의 배후에 자리한 언어관이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앞서 말한 목적을 추구했다. 그는 한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과 문장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세계의 존재 방식과 구조까지 밝힐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언어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사실적인 그림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언어관(언어 그림 이론)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관을 바탕으로 실제 세계와의 대조를 통해서 참, 거짓을 검증할 수 있는 언어가 진정으로 의미있는 언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에 관한 의미있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언어들은 경험과학적 방법을 거쳐서 정립된 자연과학의 언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직 자연과학의 언어만이 유의미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자연과학 영역에서는 한 이론의 주장이 참 혹은 거짓으로 검증가능한지, 이 이론이 사용한 과학적 방법을 반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이론의 성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 문학, 정치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언어가 사용되고, 그 사용방식을 살펴보는 것으로 더 분명해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나 일말의 진실도 있다. 즉, 언어그림이론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대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유의미한 철학적 의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언어는 검증가능한 언어, 경험과학의 언어로 한정된다. 하지만 이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비트겐슈타인 본인도 자신의 전기 이론을 이후에 비판하면서 완전히 다른 언어관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뒤에서 다룰 웨이츠를 포함해 초기 분석 미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많은 부분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관에 빚지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키는 것은 사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참 혹은 거짓으로 검증이 가능한 설명에 도달하는 것과 무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

모리스 웨이츠의 문제 의식에 대한 생각들.

사실 분석 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이 이미 제기된 적 있다. 모리스 웨이츠의 "미학에서 이론의 역할"(The Role of Theory in Aesthetics)이라는 논문에서, 웨이츠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반본질주의 언어 이론을 기반으로, 당시 미학의 여러 이론적 시도들은 "예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에 공통적인 본질을 바탕으로 예술 개념을 정의하고, 나아가 모든 예술 작품의 본질에 관한 주장을 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 정의에 관한 이론들은 실제 예술 작품들에 잘 부합하는 설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술을 식별하는 기준, 예술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예술을 식별할 때 사용하는 기준은, 기존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과의 느슨한 유사성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예술" 개념을 적용할 때 모든 작품들에 통용되는 공통적 본질보다는, 일부 작품들 간에 성립하는 느슨한 유사성을 근거로 어떤 산물이 예술이라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웨이츠가 본 예술 이론의 역할이란, 예술의 핵심 본질은 이것이라고 단언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유사성을 기반으로 예술 개념을 사용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것은 왜 예술이 되고 어떤 것은 왜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앞서 등장했던, 사태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과학적 설명과는 다소 결이 다른 설명이다

나는 웨이츠가 이 논문을 통해서 강조한 예술 개념의 의미, 기존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매개로 예술 개념의 적용 범위가 확장된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는 다양한 작품들은 서로 간의 느슨한 유사성에 의해서 ‘예술’이라는 범주로 묶인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유사성이 예술 개념을 열린 개념, 새로운 사례들을 예술 범주로 포함하는 것에 무한하게 열려 있는 개념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산물이 기존의 작품들 중 일부와 유사성을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쉽게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 않다. 예를 들면, 지금은 팝아티스트로 명성(?)을 얻은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한 때 뱅크시를 비롯한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찍어서 편집한 영상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 리모컨으로 수백개의 채널을 끊임없이 돌리는 듯한 잡다한 클립들의 집합이었고, 결국 뱅크시가 미스터 브레인워시에 관한 다큐멘터리<선물가게를 지나면 출구>를 만들기에 이른다. 미스터 브레인워시가 최초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영상은 어떤 측면에서는 현대 영상 예술 작품들과 부분적으로 겹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과, 선형적인 인과 관계로 파악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열된 장면들은 그의 작품이 현대 예술 작품들과 공유하는 부분적 유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뱅크시가 그 영상을 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기존 작품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작품들이 서로 공유하는 무수히 많은 유사성의 국면들 중에서도, 우리가 그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기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사성의 국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국면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작품들이 서로 느슨하게 공유하는 유사성에도 중요성(significance)에 따른 층위가 있고, 따라서 한 산물이 어떻게든 기존 작품들과 유사하다고 해서 예술 개념의 적용 범위가 그 산물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쉽게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술 개념이 열려 있다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문이 그렇게 아무 것에게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웨이츠가 예술 이론의 역할과 관련해서 제기한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예술에 관한 본질주의적 주장을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더이상 유망하지 않다면, 즉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에서 공통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어렵다면, 예술 이론의 역할은 예술 및 그와 관련된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어떤 것이 왜 특정한 예술 범주에 속하는지에 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이전에 썼던 과학 소설과 관련된 글도 예술 이론의 역할과 관련된 비슷한 문제 의식 하에서 쓴 것이다. 적어도, 과학 소설 작품들 모두가 갖는 공통적인 특징들은 발견할 수 없을 지라도, 사람들이 과학 소설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관행 안에서 그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 어떤 특징들을 그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다룰 수는 있다. 내가 그 글에서 말했던 표준적인 특징들(노붐과 인지적 정당화)은 개별적인 작품들이 왜 과학 소설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감상자 개인이 자신의 작품의 감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틀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나는 예술 및 그와 관련된 개념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예술 경험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예술과 관련된 주장 혹은 비평적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한 가지 언어적 옵션을 제공하는 것이, 멜러가 말한 “사태가 일으킨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키는 것”의 의미이자, 예술 이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이론의 특이성과 예술 이론가의 춤

이다민이 이동휘에 대한 답글(먼지란 무엇인가? : 이동휘의 "예술 이론의 순환성"에 부쳐)에서 이미 밝히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도 개념적 먼지는, “사태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먼지"이다. 예술이라는 사태와 관련해서 어떤 생각을 정립하기가 어렵고 혼란에 빠지는 이유, 즉 나의 관점이 흐려지는 이유는, 특정한 예술 작품이나 예술 장르에 관한 무수히 많은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술 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은 말을 하는 영역이 없다. 한 줄 코멘트에서, 조금더 가벼운 감상문, 비평문, 논문에 이르기까지, 예술에 대해서 각기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많은 언어들이 있다. 예술에 관한 다양한 언어들 속에서 예술 혹은 그와 관련된 개념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는 경우, 그래서 예술 현상을 마주했을 때 어떤 개념으로 나의 경험을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경우가 개념적 먼지가 일어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대략 어떤 것인지, 어떤 개념적 구분이 이런 상황에서 혼란을 제거하는데 유용한지는 이다민이 가상의 대화 사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다민이 말한 가상의 대화 상황처럼, 사태와 관련된 개념적 먼지는 보통 사람들이 예술작품에 관해서 일상적으로 말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예술 이론도 넓게 보면 예술에 관한 언어에 속한다는 점에서, 큰 차원에서는 이러한 개념적 먼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부분적으로 일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동휘가 예술 이론에 관해서 그것이 “먼지를 불러일으키는 에어블로워”라고 말한 것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예술 이론이 예술에 관한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먼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예술 이론이 그 먼지를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예술 이론은 넓은 범주에서 예술에 관한 언어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에서 발생한 먼지를 진정시키는 것을 내적인 목적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예술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은, 개념적 먼지를 정리 정돈하는 작업을 추구하며, 이 작업의 효용은 이론가 자신이 보기에 정리가 잘되었다는 주관적 만족감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잘 이뤄진 예술 이론 작업은 애매한 개념이 각기 다른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분명하게 해주고, 어려운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맥락적 지식을 제공하고, 개념 사용 방식과 관련된 오류를 지적하면서, 개념적 먼지를 정리정돈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술 이론 중에서도 어떤 세부 전공을 택했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이론 작업을 서술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나는 이 작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학자들의 선행 연구나 저술뿐만 아니라 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갖는 질문이나 문제 의식 등, 예술에 관한 다양한 언어들은 이론 작업의 재료가 된다. 연구자는 이 재료들을 바탕으로 자기 이론의 핵심적 질문이나 문제의식이 돋보이게 만드는 맥락을 설정하며, 선행 연구나 저술들을 분석해서 논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문제 의식이나 질문과 관련된 한 가지 설명을 만들어낸다. 즉,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사람이 정돈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적 대화 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나 비평가의 개념 혹은 이론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개념적 먼지에 대한 정리 정돈이다. 개념적 먼지를 진정시킨다는 것은, 분석 미학을 비롯한 예술 이론이 이런 작업의 개요 및 규칙에 의거해서 내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고, 이론의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선행 연구나 저술, 메모, 아이디어 노트, 빈 한글 창 위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고통과 희열의 춤(...)을 춘다. 그리고 예술 이론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은, 예술 이론도 예술에 관한 언어로서 먼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서술될 수 있다는 점과 양립가능하다. 즉, 이동휘가 말한대로 예술 이론이 더 넓은 층위에서는 먼지를 불러일으키는 에어블로워라고 해서, 이 사실은 예술 이론이 먼지를 정리정돈한다는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을 반박하거나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물론 먼지를 정리정돈한다는 목적에 맞춰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목적이나 다른 개요와 규칙을 바탕으로 구성된 예술 이론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이동휘가 앞으로 구체화하고 싶은 방향은 이런 쪽인 것 같다. 하지만 문헌 연구, 개념 분석, 논증 없이 다른 개요나 규칙을 따라서 구성되는 예술 이론이 어떻게 가능한지 사실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내가 예술 이론을 예술 철학의 작업들로 조금 좁게 이해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이동휘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먼지를 정돈하는 것과는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예술에 관한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 이론이 아닌 다른 종류의 언어(예를 들면, 비평이나 감상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동휘가 자신의 입장을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기를 기다리면서...다시 컴퓨터 앞에서 메모장과 빈 한글 창, 논문 파일 위를 오가는 춤을 춰야겠다.

부록 : 먼지와 예술 이론에 관한 논쟁에 부쳐.

이 글은 이동휘가 쓴 "예술 이론의 순환성(분석 미학 비판?)"에 대한 답글로서 기획되었지만, 내가 이 글을 느릿느릿 작업하는 사이에 다른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 서로 핑퐁이 오가기도 했다. 이다민이 이동휘의 글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을 밝혔고 (앞에 링크 달아놓음.) 그 글에 대해서 이동휘가 다시 답글(먼지가 뭔지: 이다민의 ‘먼지란 무엇인가’에 또 부쳐-이 글 또한 현재는 공개되어있지 않다.)을 썼다. 뭔가 그 사이에 진행된 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코멘트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이 부록을 쓴다.

이다민의 글은, 내가 먼지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보여주기도 해서, 특별하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없다. 분석미학의 한 개념적 구분을 바탕으로, 그 구분이 어떤 상황에서 개념적 먼지를 제거하는 역할을 해줄지를 가상의 대화 사례를 통해서 깔끔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동휘가 말한 것처럼, 예술의 평가적 의미와 분류적 의미의 구분에 대한 이론적 문제제기의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개념적 먼지가 제거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글에 끌고올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러한 구분의 타당성과 관련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동휘의 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 좀 있었는데, 특히 이 부분에서 질문이 가장 많이 들었다. 이동휘는 예술 이론이 개념적 먼지를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는 "예술 이론의 효용을 독자의 주관적 상태로 치환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고, 그럴 경우 이론가 스스로가 예술 이론이 이런 효용을 갖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고(목적을 잘 달성하는지 여부는 독자의 상태에 있기 때문), 더불어 예술 이론의 목적이나 이론의 적절성을 판정하기 위한 기준은 먼지를 진정시킨다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 이론이 개념적 먼지를 정리정돈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어떤 의미에서' 예술 이론의 효용을 주관화하는 것으로 치환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개념적 먼지가 잘 정돈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독자나 이론가가 받아들이고 있는 암묵적인 규칙이나 기준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예술 이론은 개념적 먼지를 정리정돈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예술 이론이 독자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갖는 효용은 객관적 측면(가령, 예술 이론의 관행에 참여하는 이들이 받아들이는 암묵적 규칙)에서도 서술될 수 있다. 즉, 예술 이론의 효용을 주관화하는 것이 곧 그 효용의 객관적 서술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전에는, 이동휘의 지적은 겉으로 드러난 표피를 어루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예술 이론의 효용을 '먼지가 정돈되었다는 독자의 판단'으로 주관화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예술 이론이 이를 목적으로 할 수 없다거나 예술 이론가가 그러한 효용이 달성되기 전에는 자기 이론이 적절한지를 판정할 수 없다는 함축이 뒤따르는지 여부이다. 사실 이 주장에는 필요한 논증이나 설명들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주장의 배후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함부로 추측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앞 단락에서 말했듯이, 예술 이론의 관행에 참여하는 이들이 예술 이론을 생산하기 위해서 혹은 평가하기 위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면, 왜 예술 이론이 이러한 규칙을 바탕으로 먼지를 정돈한다는 목적을 가질 수 없는지, 독자의 판단에 앞서서 이론가가 자신의 작업이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없는지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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