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일기 1: 시작의 마음, 어려움, 관찰들.

연구일기를 시작하며.

대학원 학위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졸업을 간절하게 바랄 것이다. 물론 재학생이나 수료생의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신분이 내가 다른 일들을 더 진행하는데 장애물이 될 때도 있고(가령, 강사 지원을 할 때 혹은 교수 지원을 할 때 박사 학위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무엇보다 할 일 목록의 체크되지 않은 항목을 몇 년 동안 지니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마음을 무겁게 한다.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보일러실에 매번 처박히기만 하는, 한 번도 정리한 적 없는 박스가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언제 한번 열어서 정리를 하고 버릴 건 버리고 털어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계속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런 것.

저 이삿짐 박스는 단순히 은유가 아니다. 논문 준비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연구들이 쌓이고 정리할 것은 더 많아지기 때문에, 머리도 무거워지고 뭔가 글도 명확해지기보다는 점점 불투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래는 2달에 한번, 그동안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이나 생각들을 적는 대학원 일기를 써왔는데, 연구 일기는 논문을 쓰는 나의 머리를 좀 가볍게 만들고, 머릿속에 가득 차있는 연구 논문들을 어떻게 솎아낼지를 정하기 위해서 쓰려고 한다. 그래서 연구 일기에서는 연구 이야기만 한다… 그렇지만 논문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논문 쓸 때 겪는 감정들 및 논문 내용을 발전시키는 중에 나한테 인상을 남겼던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로 꾸리려고 한다. (콘텐츠에는 예능, 책, 논문 다 포함됨.)  

연구의 어려움. 

여러 군데에서 알음알음 언급했지만, 내 학위 논문 주제는 ‘창의성의 철학’이다. 내가 이 주제를 택한 이유는, ‘창의성’ 개념이 빈 깡통 취급을 받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능열쇠처럼 언급되는 것으로 보였고…  창의성에 대한  논의가 철학에서도 최근에 시작되었으며,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이뤄진 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산물을 창의적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나 산물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무엇을 좋다고 하는 것인지 등을, 창의성의 성립에서 중요한 조건들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창의성을 학위 논문 주제로 선택한 나는 다음의 문제들을 마주했다. 첫 번째로, 창의성은 너무 간학문적인 개념이다. 철학뿐만 아니라 교육학, 경영학, 심리학 등 이걸 언급하지 않는 학문이 없었다. 교육학이나 경영학의 몇몇 분야에서는 심리학의 창의성 연구들을 기반으로 응용연구를 하는 것(교육환경에서의 창의성 증진의 기법이나 고용자들의 업무 생산성과 관련된 창의성 촉진의 기법 등)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내가 이것들까지 다 알아야 할까? 다른 학문의 논의들은 내가 창의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생각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이론적인 심리학과 철학에만 집중하기로 결정을 하긴 했지만, 애초에 창의성과 관련해서 너무 많은 말들이 있어서,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추리는 것이 어려웠다. 

두 번째로 어려운 점은, 내가 옹호하려는 창의성에 대한 정의가 최근에 철학에서 제시된 창의성에 대한 다른 설명들에 비해서 어떻게 유용할지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미학은 미적 판단, 미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행위나 선택에 대한 정당화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한 사람이 미적 주체로서 내리는 판단과 여러 실천들에서 고려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학문적 논의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미학의 논의 범위가 이것보다는 더 넓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맥락에서는 미학의 논의 범위를 이렇게 좁혀 놓는 것은 내가 느끼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미적 판단이나 미적 선택에 대한 정당화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우리의 판단과 선택,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고려사항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거나 어떤 취미 활동을 선택할지를 고민할 때 아주 세부적인 부분들까지 결정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학 이론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론, 특히 실천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활동들을 다루는 이론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윤리학이 인간의 윤리적 판단이나 선택, 행위 등이 어떤 고려사항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제공하지만, 개별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창의성’에 대한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창의성의 요건들을 분석하고 그 의미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고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가질 수 있는 효용은 모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우에서 무엇이 창의적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철학은 개별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판관처럼 ‘이게 맞고 이게 틀리다는 결정’을 해준다기보다는 그러한 사안들을 마주 했을 때 스스로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기 위한 사고의 도구/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창의성에 대한 철학도 창의적인지 여부가 논쟁이 되는 사례이든, 창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형적인 사례이든, ‘이것이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들에 대해서 그것이 왜 창의적인지를 숙고하는데 도움을 줘야 한다. 창의성에 관한 나의 정의는 아직 만들어가는 중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 정의가 다른 정의들에 비해서 무엇을 더 잘해줄 수 있을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뭔가 이론을 정밀하게 구성해나갈 동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지금까지 읽은 논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참조하거나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돈다. 일단 논문 1장을 써보면서 약간은 정리가 되긴 했지만, 결국 또 다른 방식의 논리 전개가 더 적절해 보이면, 지금까지 쓴 것을 재구성하는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한다. (이 공사는 이미 진행 중…😇) 몇 번이나 공사를 하면서 내 글을 다시 보는 과정은 힘든 과정이다. 지치고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자꾸만 이런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내 정신을 너무 깊게 몰입하게 만들지 않을 예능들을 탐색하게 되었다. 그렇게,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한창 빠져있던 것이 바로 제빵 서바이벌 예능이었다.  

제빵 세계로의 도피.

제빵 서바이벌 예능을 보게 된 이유는, 내가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서바이벌 예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전자들의 유쾌함, 즐기려는 태도, 도전의식도 좋았다. 우승을 하겠다는 결심을 스크린 너머로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한 자신감 있고 긍정적인 태도는 프로그램 기획자들로부터 요청받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제 목표는 우승이에요.”같은 말을 카메라 앞에서 주문처럼 외우고 들어가야 세트장에서 준비해온 것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우승을 향한 열망, 자신감 있는 태도는 세트장에 들어서서 주어진 시간 안에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운을 얻기 위해서 보기 시작한 제빵 프로그램이었지만, 이 프로그램들이 내 논문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점차 하게 되었다. 특히 이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참조하면 좋을 몇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 제약 하에서 일어나는 제작.

첫 번째는, 모든 제작이 특정한 제약 하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모든 제작 경연 프로그램에는 시간제한과 주제가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만들어야 하는 산물의 종류가 지정되는 경우도 있고, 제작 과정에서 꼭 사용해야 하는 재료가 있기도 하고, 아니면 제작물이 통과해야 하는 기능과 관련된 시험이 있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 <베이킹 임파서블>은, 베이킹과 공학을 접목시켜서, 먹을 수 있으면서도 공학적으로 작동하는 산물을 만드는 과제가 매회 주어졌는데, 이 경연에서 참가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결과물의 기능과 관련된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예를 들면, 먹을 수 있는 배에는 동력을 제공하는 모터가 달려있어야 하며, 실제로 물에 떠서 몇 미터 이상을 나아가는 시험에 통과해야만 한다.(물론  모터 같은 기계 장치는 먹을 수 있는 재료로 이뤄져있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모터를 제외한 모든 부분들, 돛이나 갑판, 닻 등은 먹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져야 했다.)

이미지는 넷플릭스(www.netflix.com)에서 갈무리

나는 시간제한과 주제만 있는 경우보다는 만들어야 하는 산물의 종류나 기능에 대한 제약이 있는 프로그램들을 더 재미있게 보았다.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제작의 경우, 제작자들이 각종 제약들을 만족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하는지, 그 시도가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종류의 산물을 만드는 방식으로서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는 시도인지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제작자들 인터뷰를 따면서 제작물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도 요청하는 것 같은데, 제작 장면과 제작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 인터뷰 장면이 번갈아 나오니까 ‘지금 하는 게 아까 말한 그거 하는 거구나.’, ‘이 단계에서는 저 사람이 굉장히 모험적인 시도를 했구나’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기도 했다. 

물론 모든 제작 활동이 경연 프로그램 같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약들이 있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연 프로그램과 정확하게 같은 환경은 아닐지라도, 모든 제작 활동은 제작 환경, 예산, 제작자 개인의 관심사나 배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제약 하에서 일어난다. 제작 활동이 갖는 이러한 성격은 제빵이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작가의 작품에 대한 제작 활동에도 적용된다. 예술 작품은 물론 디저트나 빵과는 다른 종류의 산물이지만, 결국 이것을 만드는 이는 인간이고 작품의 제작 또한 환경, 예산, 제작자 개인의 관심사나 배경의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창의적인 제작이 되려면 제작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약에 의한 구속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의적인 제작의 반대말은 기계적인 제작이며, 제작 활동이 특정한 제약 하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그 제작이 기계적인 제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계적인 제작이란 결과물에 도달하는 수단이 정해져 있어서 그 수단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러한 제작을 일컫는다. 즉, 기계적인 제작에는 원하는 결과물에 어떻게 도달할지를 고민하는 행위, 새로 고안해낸 방법을 시도해보는 행위들이 전혀 포함되지 않다는 점에서 내가 제빵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에서 본 제작 활동과는 매우 다르다.

이처럼 기계적 제작이 ‘특정한 제약 하에서의 제작’과 동일하지 않으며, ‘특정한 제약 하에서의 제작’이 기계적인 제작과 창의적인 제작 모두를 아우르는 더 넓은 개념이라면, 창의적인 제작에서 제작자가 갖는 자유도 약간 다르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자유란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으로부터 무작정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약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제약을 단순히 제작자를 구속하고 제한하는 요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를 제한하는 동시에 제작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보는 것이다. 제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특징을 가진 제작물을 기획하는 것, 그 기획을 여러 방향으로 실험해보는 것이 창의적인 제작에서의 자유가 아닐지,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제작 활동이 갖는 이러한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창의성을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협업을 통한 제작.

두 번째는, 많은 제작들이 협업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점이었다. 물론 한 명의 제빵사가 나와서 혼자서 모든 작업을 다하는 제빵 예능도 있긴 했다. <베이크 스쿼드>나 <이즈 잇 케이크>는 그러한 예능이었고, 과제의 스케일이나 업무 강도만큼 제작 시간도 상당히 넉넉하게 주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두 명의 도전자가 함께 나와서 같이 작업을 하는 그러한 경연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았다. <슈가 러시> 시리즈에는 두 명의 제빵사가 팀을 이뤄서 나왔고, <베이킹 임파서블>에서는, 제빵사와 공학자가 한 팀을 이뤄서 먹을 수 있는 기계장치를 만든다.

특히 <베이킹 임파서블>에서 제빵사와 공학자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공학자와 제빵사가 함께 뭘 만들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면서, 공학자가 산물의 작동원리를 설계하고 이를 제빵사에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어떤 식재료들을 사용해서 이 산물을 만들어야 할지도 정한다. 사실 식재료에 대한 지식은 제빵사가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재료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는 제빵사의 역할이 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고 만들다가도, 중간 결과물이 계획한 대로 작동을 하지 않거나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이 자꾸만 떨어지고 부서져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이들은 몇 가지 디테일들을 포기하거나 형태나 기능을 단순화해서 일단은 완성품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재미있었던 점은 공학자의 역할이 산물의 공학적 작동 방식의 설계 및 실험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베이킹 임파서블>에서는 먹을 수 있는 동시에 공학적으로 작동 가능한 산물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그 산물이 세련된 맛의 디저트를 운반할 것을 추가 과제로 제시한다. 이 디저트를 만드는 작업은 제빵사의 소관이고, 그러다 보니 산물을 만들 때 필요한 어마어마한 양의 식재료들을 조립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고 조리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공학자가 맡게 된다. 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제빵사들은 여러 단을 가진 커다란 케이크나 특수한 형태를 가진 케이크를 만들었던 경험이 풍부해서 그런지, 무너지지 않는 케이크를  만들려면 조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다. 말하자면, 제빵사들도 기초적인 토목 공학 지식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빵사와 공학자가 서로의 분야에 대해서 가진 아주 기초적인 이해 덕분에 이들이 전형적으로 제빵사의 일이나 공학자의 일로 여겨졌던 일들에 직접 참여하거나 개입할 수 있었고, 이러한 개입 때문에 이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 완성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근대의 천재 미학은, 천재라는 개인이 가진  상상력의 힘을 중심으로 뛰어난 예술작품의 제작을 설명한다. 천재 미학의 모델에 따르면 뛰어난 작품은 후대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작품으로, 뛰어난 작품의 제작은 천재가 지닌 상상력,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풍성하게 생성해내는 힘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으로 이해된다. 천재 미학이 의도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사회에는 한동안 한 명의 작가에게 작품의 독창성이나 가치와 관련된 모든 공적(credit)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그 작품이 성취한 뛰어난 특징들이 모두 한 사람의 뛰어난 상상력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많은 제작 활동에는 다른 누군가와의 협업이 포함된다.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회화, 조각 작품들은 조수의 도움을 받아서 이뤄졌고, 이들의 역할은 때때로 작가가 상상한 표면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수행하는 기계적인 작업 이상이기도 했다. 협업자의 역할이 작가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것 이상이라면, 협업자가 제작 활동의 특정한 단계에서 작가와 동일한 목표를 갖고 함께 고민하고 시도하는 존재라면 협업자에게 제작 활동의 결과물에 대한 공적을 생각보다 더 크게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창의성에 대한 적절한 철학적 설명은 ‘협업을 통한 제작 활동’이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확장되어야 한다.  

나가며.

혹자는 제빵이건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건 구체적인 산물들을 제작하는 활동에 대한 관찰이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구성하는 작업에서는 불필요하고, 이러한 관찰을 철학적 설명에 반영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제작 활동의 산물들, 그리고 그것들을 제작하는 방식의 다양성과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특정한 종류의 산물을 만드는 활동 자체에 초점을 두고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전개한다면, 그 설명이 철학적 설명으로서 충분한 정도의 일반성을 가질 수 있겠냐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비어즐리는, 작품 제작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에 대해서 일반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최선의 설명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업과 관련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마구 떠오르는 발명 시기와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평가하고 쓸만한 것을 남기는 검토 시기가 교차한다는 것 정도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제작 활동의 모든 세부사항들을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설명에 반영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피하고 싶은 결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피하고 싶은 것은 구체적인 제작 활동 및 그 활동의 결과물과 괴리된 설명을 만드는 것이다. 철학적 정의라는 이론적 작업이 갖는 장점은, 한 개념이 어떤 다른 개념들과 연관되는지를 이해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실제 사례들을 보았을 때 우리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인도해줌으로써 실제 사례를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는 점에 있다. 이 중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정의가 후자의 역할을 해주기 위해서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제작의 맥락’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제작은 특정한 제약 하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인간의 제작 활동이 갖는 기본적인 조건이며, ‘어떤 제작은 협업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은 모든 제작이 한 개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관찰이다. 이 두 가지 관찰은 창의성에 대한 정의가 일반성을 갖추는 것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정의를 위해서 더 면밀하게 다듬어봐야 할 중요한 참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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