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의 우울을 나누기.
들어가며.
N.K.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 중 두 번째 권인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조산력의 기원, 고요 대륙의 비밀과 오래된 전쟁, 그 전쟁을 끝낼 열쇠인 오벨리스크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요 대륙은 점차 동물들이 살기 어렵게 변해가는데, 이는 자연의 무분별한 개발 및 과도한 석탄에너지 사용으로 비인간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동물조차도 생존할 수 없게 변해가는 기후 위기를 상기시킨다.
나는 나중에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으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전기요금이 너무 올랐는데 여름에 에어컨을 틀지 못해서 열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외출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급류에 휩쓸려서 죽을 수도 있고… 폭우에 휩쓸려서 감전사할 수도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조심한다고 막을 수 없는 사고와 죽음이 기후 위기의 귀결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런 상상이 아예 허무맹랑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지구의 기후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고, 그 변화는 이미 인간이 손을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말도 간혹 들린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오벨리스크의 문』과 그 다음 권인 『석조 하늘』을 읽었고, 이 두 책은 나에게 어떤 방향성을 제안해주었다.
조산력의 기원.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제일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바로 조산력의 기원인 은빛실이었다. 은빛실은 혈관을 타고 오로진들의 몸속을 흐르고있으며 이들이 땅과 대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의 기원이 된다. 고요 대륙의 멸망해버린 문명에서는 이 은빛 실을 ‘마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펄크럼에서는 조산력의 작동원리를 지질학, 열역학, 물리학으로 설명하며, 펄크럼 오로진들은 그 지식을 바탕으로 암석 사이에 파묻혀 있는 광맥이나 열 점을 조작해서 영향을 미친다. 즉 펄크럼의 교육방식은 땅의 자연물을 통제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은빛실은 그 작동 원리가 이들에게 이용 가능한 학문적 언어로 완벽하게 기술되지 않는 힘처럼 서술된다. 그래서 소설 초반부에서는 은빛 실이 판타지의 소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설의 서사가 전개됨에 따라서 은빛 실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 번째는 오로진들이 은빛 실의 힘을 사용하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보님 기관을 자신의 감정과 분리해서 억누르고 통제하는 기존의 방식, 지질학과 열역학 지식에 의존해서 지진을 잠재우고 바윗돌을 움직이는 그러한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은빛 실의 힘을 잘 인지하거나 다룰 수 없다. 소설 속 인물인 알라배스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힘을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이 노력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은빛 실의 기원은 바로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그전까지 ‘마법’처럼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여겨졌던 은빛 실들이 나에게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축적된 퇴적층, 그 퇴적층이 쌓이는 동안 무수히 많은 동물 개체들이 생성하고 소멸해왔다. 사멸한 육체가 담고 있었던 생명력은 지층에 축적되어왔고, 지층에 축적된 생명력은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생명체들을 보닐 수 있게 하는 거대한 토대가 된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 챕터에서 에쑨은 고요 대륙 상공에 떠있는 오벨리스크들과 연결된다. 오벨리스크는 막대한 양의 은빛 실이 응축되어 있는 엔진으로, 에쑨은 오벨리스크에 접속함으로써 고요 대륙 전체의 생명체들의 힘을 느낀다. 오벨리스크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거대한 은빛 실의 네트워크, 끝없이 쏟아지는 생명의 힘에 둘러싸이는 느낌,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는 장면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지만 내 의식을 다른 존재들로 확장해서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적인 인식의 확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의 친환경 라이프.
작년부터 육고기를 최대한 줄이는 식생활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내 생활에서 바꾸거나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실천해보고 있다. 예를 들면, 샴푸나 바디워시, 설거지 세제를 모두 비누로 바꾸는 것, 필요한 식료품이나 물건들은 되도록 마트에 직접 가서 사는 것, 텀블러를 항상 사용하는 것, 세탁용 세제처럼 리필해올 수 있는 것은 빈 통에 리필해오는 것, 원두찌꺼기, 테트라팩, 브리타 정수기 필터 등 재활용 가능한 자원은 자원순환센터에 주고, 옷이나 화장품을 과도하게 사지 않는 것, 가능하면 중고도 찾아보는 것.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냐고 주문을 걸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실천들을 하다가도 허망함을 느낄 때가 많다. 결국에는 나의 삶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트에는 비건 냉동식품이나 소스가 아주 한정적으로 구비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택배를 이용하고 또 포장 쓰레기가 한 더미 나온다. 텀블러를 들고 다녀서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긴 했지만 마트에서 야채를 사다 보면 또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가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명절마다 쏟아져나오는 과대 포장된 선물 세트, 페스티벌에서 음료를 텀블러에 담아주지 않는 부스를 보면, 내가 일상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고 육고기를 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른 불편한 점들도 있다. 우리 집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세탁세제 리필을 하거나 품질이 좋은 비누를 구입할 수 있는 가게가 없다. 대중교통으로 30분은 이동해야 한다. 심지어 브리타 정수기 필터나 원두찌꺼기를 재활용하려면, 대중교통을 타고 1시간 정도는 이동을 해야 한다. 자원 순환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날을 잡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나야 한다.
요즘 친환경이나 비건이 소비 시장의 떠오르는 키워드가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하는 실천들은 사회적 운동이기보다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에 가까운 것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식으로 소비시장이 움직여서 특정한 생활습관들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좋은 품질의 친환경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이나 그러한 제품을 파는 가게가 잘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이 친환경, 비건 제품을 소비하는 식으로 소비 양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날 잡고 정수기 필터나 원두찌꺼기를 재활용하기 위해서 먼길을 떠날 힘이 있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에 의존해서 우리 사회가 바뀌고 있고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재활용 소재를 사용한 친환경 제품이거나 동물성 소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비건 제품이라고 해도, 그 제품들을 싼값에 대량 생산하고 그과정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화학약품이 많이 사용된다면, 광고나 마케팅을 통해서 큰 이윤을 남기기 위한 위한 대량소비가 이뤄진다면, 친환경, 비건이라는 말이 붙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특히 의류의 경우가 그러하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의류 공장에서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의류들은 유럽, 미국, 동북아 국가들에서 다 팔리지도 못하고 재고가 되어서 아프리카와 남미로 가서 쓰레기 산을 이룬다. 내가 먹고 있는 음식물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생각해보면 비슷하다. 아보카도는 탄소발자국이 높은 식재료로 악명이 높다. 특히 물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아보카도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경우 아보카도 재배 지역의 주민들은 물 부족 문제를 겪는다고 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의 원재료들은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져서 또 다른 나라의 공장에서 조립되어서 우리에게 배송된다.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는 물류 시스템이 발전된 결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산 절차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소비자들은 그 복잡한 과정에는 눈을 감고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제품이 광고 문구대로 ‘친환경’이거나 ‘비건’이거나 ‘어떤 기업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들어졌다거나 ‘유명인 누가 광고한’ 제품이라는 점에 집중하면 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가해의 구조를 정확하게 보기.
다시 에쑨이 보닌 대륙의 생명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때 에쑨이 무엇을 인식했는지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데, 아마도 에쑨의 인식 지평이 담아내기에는 대륙에서 일어나는 생명활동이 너무 방대하고 많기 때문일 것이다. 에쑨은 오벨리스크와 연결되기 전에 다른 오로진들의 몸속에서 순환하는 은빛 실을 매개로 그들과 작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그때 그가 주변 지역에 퍼져있는 여러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더 자세했다. 화산재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생명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있었다. 그 생명체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동물들도 포함된다. 의식에 그토록 많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들어오는 경험, 그 많은 생명체들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이는 항상 기쁘고 충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나와 연결된 다른 생명체들의 삶을 인식하는 것이란 고통스럽고 힘들다.
나는 수도권에서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나의 전기 사용은 발전소가 지어진 지역의 생명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수도권의 전기 사용량이 매우 큰 폭으로 줄지 않는다면, 지역의 노후 발전소의 가동을 중지하고 지역민들의 건강과 자연에 나쁜 영향을 덜 미치는 발전 방식으로 바꾸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개인의 전기 사용량보다는, 값싼 산업용 전기 요금으로 공장을 밤낮없이 돌리면서 생산과 소비를 촉진해왔던 경제 성장의 문법이 바뀌는 것이 더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전기를 아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리고 내가 쓰는 전기가 공장에서 쓰는 전기에 비하면 아주 적다고 해도, 결국 그 전기는 다른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자연을 희생해서 만들어낸 전기이고, 더 나아가서는 석탄과 석유를 시추하는 국가의 자연을 파괴해서 만들어낸 전기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착취 시스템의 가담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단지 그 시스템에서 내가 차지하는 파이가 작을 뿐. 더 무력한 점은 한국의 전력발전 시스템은 내가 잘 이용하고 있는 여러 개의 착취 시스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에쑨은 은빛 실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주변 지역과 대륙 전체의 생명력을 보닌다. 그리고 은빛 실들을 조작해서 자신의 지역에 침입한 군대를 몰살하고 군대를 보낸 도시 전체를 쓸어버린다. 이는 에쑨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에쑨은 침입자들의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도시 사람들이 생명력이 넘치는 유기체에서 견고하고 단단한 무기물로 바뀌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다음 권인 『석조 하늘』에서, 에쑨은 이 장면을 대단한 승리로 기억하는 대신 자신의 괴물 같음을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기억한다. 나의 행위로 인해서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어떻게 사그라드는지를 직접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 『석조하늘』에서는 대지에 축적된 풍부한 은빛 실을 강탈 하려다가 멸망해버린 실(Syl) 문명의 역사도 중간중간 함께 제시되는데, 대지는 이러한 강탈을 계획한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은빛 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통제하고 착취했던 실험체들까지도 모두 다 가해자로 인식한다. 누가 착취 시스템을 설계했는지, 이 시스템의 잔인함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 시스템을 이용하는 정도와 상관없이 시스템에 연루되어 있는 모두는 착취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가해자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대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다. 나는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역의 생명체들을 파괴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으며, 유제품이 들어간 음식을 먹음으로써 젖소들을 끊임없는 임신과 출산의 굴레 속에서 살도록 착취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그러한 가해자성을 인식했을 때의 고통, 그것을 중단하기 위해서 어디에서부터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는 무력감은 견디기가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럴 때는 내가 그리고 인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고통과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가기.
소설 속의 오로진들은 대부분 고통과 무력감, 철저히 혼자라는 감각 속에서 살아간다. 제국 펄크럼의 명령에 따라서 착실히 살아온 것이 오로진을 착취하는 시스템의 유지에 기여했다는 점, 나의 생존을 위해서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상처받거나 죽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오로진들은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겪게 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품고 세상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때그때의 생존만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카는 다른 오로진들과는 달리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이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과거에 그가 오로진임을 알고도 죽이지 않았던 공동체를 경험했다는 점이 언급되긴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 때문만 일까? 이카는 그 경험을 그냥 운 좋은 사건으로 볼 수도 있었고, 오로진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렸던 추억을 별로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향은 사람들을 쓰임새에 따라서 분류하고 오로진이란 어떤 쓰임새 신분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어제 잘 지냈던 사람들도 언제든지 돌변해서 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별로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오로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현명한 선택이니까. 하지만 이카는 자신의 경험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사람들과의 추억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랬기에 오로진들이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 오로진과 오로진이 아닌 사람들이 서로에게 평범한 이웃이 되고 소소한 추억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석조 하늘』에서 이카는 에쑨이 카스트리마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자 단단히 화가 나기도 했는데, 이 장면을 통해서도 이카가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의 경험, 그들과 쌓은 추억이 갖는 의미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경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이카의 태도에서 기후 위기의 무력감과 고통을 견뎌낼 열쇠를 얻을 수 있었다.
지울 수 없는 가해자성은 나를 힘들게 만들고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세상은 망하고 모두 다 죽는다’라는 체념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해왔던 것들을 계속해올 것이다. 식재료를 사러 가는 길, 자원순환을 하러 가는 길에서 변하는 계절의 풍경을 마주하는 것, 직접 조리를 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새로운 요리에도 가끔 도전해보는 경험은 나의 일상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이 실천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들과 상관없이 내가 이용하는 어떤 것들은 다른 생명체의 삶을 착취한 결과물이며, 나는 착취 시스템에 가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주 엄격한 실천을 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생명을 착취하는 시스템에 가담해왔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그 시스템의 불평등함을 인식하고 그때의 고통과 무력감을 주변의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실천을 하면서 또 고통과 무력감을 공유하는 타인을 마주할 때, 내가 느끼는 고통과 무력감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로진들이 느끼는 감정을 기후 위기와 관련된 고통과 무기력감과 연관해서 이해하고 나니, 내가 가진 감정들이 조금은 견딜 수 있는 형태로 그 모양을 바꾼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고통과 무기력감이 덜어지거나 완화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감정을 내면을 좀먹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식으로 변환해서 쓸 수 있게 된 것에 가깝다. 이 글도 그 힘으로 써보았다. 기후 위기로 인한 우울감에 시달리는 누군가에게 그 우울감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 그 우울감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해볼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해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