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일기 2: 연구에 회의를 느낄 때.
첫 번째 연구 일기를 쓰고 공유를 하면서, 학위논문의 방향성에 대한 확신과 논문을 쓰는 작업을 이어나갈 힘을 얻었는데,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고 다듬는 작업에 들어가니 이 힘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논문은 장기 프로젝트인데 이 힘은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 쓰고 고치고 뭔가를 새롭게 읽어보고 다시 구조를 짜는 작업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모은 기운은 쉽게 증발해 버린다.
예전에 ‘공부 노동자가 가지면 좋은 습관’이나 ‘인문학 석사 학위 논문 쓰기’를 주제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첫 번째 글에서는 논문작성과 상관없이 연구자의 삶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나 태도에 대해서 말했고, 두 번째 글에서는 내가 석사 학위 논문 썼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석사 학위 논문을 쓸 때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말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일에 필요한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에게 얻는 피드백, 하지만 그 피드백 하나하나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내 논문을 가장 잘 알고 이걸 어떻게 쓰거나 고칠지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 자신에게 필요한 루틴을 만들어내는 것.
위의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 잘 알지만… 그렇다고 쓰는 과정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작년은 수료 후 첫 해라서 학위 논문을 어느 부분까지 쓰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연말이 될 때 까지도 시작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어서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조급한 마음 때문에 더 힘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번달의 연구 일기에서는 이 조급한 마음을 되돌아보면서… 무엇 때문에 내가 계획한 것을 지키지 못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 계획이 원래 좀 컸다.’ ‘계획은 원래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일이 많았다.’라는 것 외의 다른 말로 결론을 내보고 싶다.
주제 자체가 문제일까?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갈팡질팡하게 된 이유를 곱씹어보면, 내가 창의성을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다루는 것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때의 회의감은 내가 이 주제로 논문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다음, 창의성을 접근하는 다양한 학문들의 논의를 접하면서 들었던 회의감과는 약간 결이 달랐다. 그때의 회의감은 창의성이라는 간학문적 주제를 내가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창의성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하는데 내가 이 논의들 중 유의미한 것들을 골라내서 잘 정리하고 내 나름대로의 입장을 도출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거에 내가 가졌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느꼈던 회의는 창의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 과연 오늘날 중요한지, 시의성을 갖는지에 대한 것에 가까웠다.
나는 철학이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나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답을 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생각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사회에 대해서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려면 철학 논문으로서 갖춰야 하는 엄밀함이나 형식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내 논문을 통해서 우리가 특정한 현상이나 경험을 프레이밍 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틀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지난 연구 일기가 바로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창의성에 대한 나의 철학적 탐구가 ‘창작이 제약 하에서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협업을 통한 창작’을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늘날 위와 같은 현상들이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내가 그것들을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배제하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히려 창의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우리에게 제시해야 하는 사유의 가능성은 더 급진적인 것,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 아니라 아직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창의성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동물의 창의성이나 식물의 창의성 같은 주제처럼 말이다.
동식물의 창의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재작년부터 기후 위기와 인간 중심적 자연 개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자연의 변화무쌍함으로부터 인간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자연 개발을 했다면, 오늘날의 자연 개발은 단순히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 즉 자원을 채굴해서 이득을 얻자는 목적, 건축물을 짓고 그 건축물을 팔거나 임대해서 금전적 이득을 얻자는 목적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비인간 생명체들에게는 그러한 개발이 어떻게 느껴질까?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비인간 생명체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인간도 하나의 생물 종일뿐인데 말이다. 물론 창의성의 정의와 인간 중심적 자연 개발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창의성의 정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인간 중심적인 자연 개발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애초에 ‘의성 개념이 인간의 탁월한 성취들을 가능하게 한 특별한 심리적 능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 논문이 “인간이 동식물과는 다르게 이렇게 특별합니다~”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결국 논문에서는 인간의 성취들을 사례 삼아서 창의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창의성의 조건에는 산물을 만들어내는 행위자의 특징도 포함되는데, 이 특징을 인간과 같은 심리 체계를 지닌 개체들만 지닐 수 있다면, 나의 창의성에 대한 정의는 동물과 식물을 창의성의 주체에서 배제하게 된다. 나도 편리한 인간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은 실천들을 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지만, 이왕이면 내가 하는 학문이 인간이 동식물과 구분되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동식물과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차이는 한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동식물 또한 흥미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조직화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학위논문 주제는 나의 그러한 바람과 달리 너무나도 인간중심적인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창의성이 인간중심적인 주제처럼 보이는 이유는, 주로 인간의 성취가 창의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창의성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인간의 어떤 능력 때문에 그런 성취가 가능한지를 해명하는 것에 집중해 왔고, 자연스럽게 창의성은 인간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하지만, 창의성을 인간만 지닐 수 있는 특별한 심리적인 능력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한 주체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창의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들의 범위는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슷한 종류의 다른 산물들과 비교해서 새로운 국면이 있어야 한다던지, 특정한 맥락에서 가치 있거나 적합해야 한다던지, 아니면 그 산물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한 개체의 행위자성을 행사해서 만든 산물이어야 한다던지..)
그리고 어떤 산물을 ‘창의적’이라고 하기 위한 조건을 탐구하기 앞서서, 사람들이 창의성이란 말을 어떤 식으로 사용해 왔는지, 창의성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갖고 있었는지를 되짚는 것은 필요하다. 기존의 관점들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서 창의적인 산물의 조건을 탐구할 때의 길잡이가 되어줄 중요한 전제들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어떤 산물들이 동식물의 창의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직은 그러한 사례들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공부가 더 필요하고, 사실 이 부분까지 학위 논문에 포함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동식물이 인간과 다른 생물종으로서 갖는 독특한 특징들 때문에 동식물의 산물이 창의적인 방식과 인간의 산물이 창의적인 방식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동식물의 창의성을 설명하려면, 동식물이 어떻게 행위자성을 갖는지, 동물의 산물이 어떻게 적합성을 갖는지 등을 다루는 별도의 논의가 더 필요하다. 동식물의 창의성과 관련된 사례들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의 산물이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지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동물학에서 진화론이나 동물 신경계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조금씩 이뤄져 왔다. 식물의 창의성은 아직까지는 생소한 주제이긴 하지만, 식물의 행위자성(agency)을 다루는 논문을 최근에 발견하기도 했다. (Helen Steward, “Plants, wants, and agent” (2022))물론 식물이 가질 수 있는 행위자성은 인간이 갖는 지향적인(intentional) 행위자성,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숙고하고 자신의 행위를 조정하고 수정한다는 의미의 행위자성은 아닐 것이다. 식물의 행위자성을 탐구하는 논의는 지향적인 행위자성과는 다른 의미의 행위자성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러한 행위자성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학위 논문을 쓴 다음에 별도의 기획을 바탕으로 연구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동식물의 창의성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들을 낭만적으로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식물 모두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산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의적일 수 있다면, 결국 인간을 동식물과 구분해 주는 중요한 특징 하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창의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이 제기된다. 사실 인공지능의 창의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기저에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지는 창작까지도 기계가 할 수 있게 된다면, 기계가 여러 가지 복잡한 지적인 작업에 있어서도 인간을 대체(?)하는 일이 머지않은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깔려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의문에 대해서 철학은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고요..’라고 답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창의성의 실현이 곧바로 사회적 영역에서 인간의 배제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창의성이 인간의 중요한 성취로서 의미를 잃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심리 체계와 학습 체계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인공지능이 학습을 하고 산물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은 인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고 그런 점에서 인공지능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행위자성을 바탕으로 특정한 산물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동식물의 창의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인간을 동식물과 구분해 주는 중요한 특징 하나를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식물이나 인간이 모두 특정한 산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의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이들이 생명체로서 갖는 중요한 특징을 강조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연구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서
그래서 왜 작년에 계획한 만큼 쓰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강의나 논문투고 같은 일이 중간에 생긴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논문 주제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그 회의감을 떨치면서 논의 방향을 다잡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느라고 실제로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미 쓴 부분을 뒤엎으면서 다른 구조를 고민하기도 했고, 논문의 앞부분을 특히 많이 고쳐 썼다. (지금도 수정 중..) 동식물의 창의성에 대한 논의를 이 논문에 포함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 주제에 대한 후속 논의를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창의성에 대한 정의를 해야겠다는 작은 목적 하나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얼른 졸업을 해서 동식물의 창의성 사례들도 찾아보고 관련된 논의도 해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도 생겼다. 물론 그건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고, 그 사이에 누군가가 동식물의 창의성과 관련된 연구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먼저 진행된 그 연구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볼 것 같다. ‘나랑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했던 사람이 또 있구나.’, ‘이 사람은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내는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논의가 정확하게 똑같이 진행될 수는 없다. 가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같아도 거기에 도달하는 방식은 다 다르고, 내가 그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걸 비판하는 식으로 논의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사유 궤적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문학 연구의 재미있는 지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