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일기3: 친숙한 것에서 멀어지기.
2023년 연구 근황
2번째 연구 일기로부터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1년간 틈틈이 작업한 논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방향성과 구조는 많이 바뀌었고, 바뀐 방향성에 따라서 논문의 앞부분을 또 고쳤고 지금까지 읽은 문헌들을 혹은 읽지 않고 내버려 뒀던 문헌들, 그리고 새로 찾은 문헌들을 다시 읽으면서 2장의 논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항상 같은 단계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이전 버전의 논문 목차나 글들을 보면 이전보다 지금이 더 좋아진 것이 눈에 보이고 그에 따라서 내 주장에 대한 확신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논문 쓰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 더 빨리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바라면서 목차, 노트, 논문 파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나의 연구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내 연구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혼자 던져보았다.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으로 매우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성취를 이룬 천재들이나 그들의 삶을 추적하는 연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천재들의 삶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나는 ‘창의성’과 관련해서 어떤 학문적 탐구가 이뤄져 왔는지,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 규정 방식을 통해서 우리가 ‘창의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기존에 창의적이라고 이해되어 왔던 것들 혹은 창의적인지 여부가 논쟁적인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지를 숙고하기 위한 개념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물론 내 관심이 개념적 의문이라고 해서 실제 사례들을 아예 배제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재를 내가 다루는 사례로 고려해야 할지, 그 사람들을 전형적인 사례로 삼아서 분석하는 설명을 (또?) 해야 하는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천재의 삶의 에피소드나 습관에 주목하는 것이 무엇이 창의적인지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즉 나의 창의성 연구는, 인류사의 천재나 주목받지 못했던 창작자에 대한 생애사 연구는 아니다.
내가 연구에서 주로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창의성을 이해하는 것과 연계될 수 있는 과거의 철학적 논의와 현대 심리학의 창의성에 대한 논의를 검토하면서, 그 논의들의 빈틈을 찾는다. (2) 그 빈틈을 메우고자 등장한 창의성에 대한 비교적 최근의 철학적 논의들을 검토를 통해서 창의성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제안한다. 창의성에 대한 내 입장은 거칠게 말하자면, 특별한 심적 역량인 창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주체가 창의적인지 여부는 그가 어떤 심리적 역량을 갖추었는지 혹은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쳤는지 보다는 ‘무엇을 만들거나 수행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직 나의 적극적인 정의는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기존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을 쌓으면서 내 정의를 위한 밑작업을 하는 중이다.
새로운 NEW! 어려움
2년 전에는 창의성이라는 주제가 너무 간학문적이라서 내가 살펴봐야 할 연구들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그리고 1년 전에는, 창의성에 대해서 철학적 관점에서 한 마디를 얻는 게 얼마나 유의미한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서 논문 방향성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어려움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 감정이 든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면서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1년간 학위논문 집필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어려움이 떠올랐다. 계획하고 있는 논문의 구조 상 심리학자들의 창의성 연구를 참고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학자들이 창의성을 설명하는 방식, 논의의 의의와 한계를 서술하는 언어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심리학이 창의성을 사용하는 언어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논의를 정리하면 지루하고 평면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런 정리는 이미 창의성에 대한 심리학 개론서에서 하고 있는데 굳이 내가 왜 다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글의 구성을 재고해야 했다.
심리학의 서술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언어와 논리로 기존의 입장들을 엮어내고 분류할 수 있을까? 심리학의 창의성에 대한 개론서들을 몇 권 살펴보면서 느꼈던 점은, 심리학에서는 창의성에 관한 정말 많은 논문들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개론서도 그런 연구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여기까지 이뤄져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이 창의성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관심사가 옮겨간 이유(예를 들면 창의성의 측정에서 창의성을 촉진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관심사가 이동한 계기)는 무엇인지, 창의성의 종류에 대한 구분은 심리학 안에서 왜 등장했는지 등, 지식이 형성된 과정을 메타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찾기가 어려웠다. 때때로 그런 계기들을 짚어주는 개론서가 있기는 했지만, 조각 정보들일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심리학의 논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다가 잠시 시선을 멀리 해서 그런 논의를 둘러싼 배경을 서술하는 식으로 시점 이동을 하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철학과 심리학 바깥을 들여다 보기.
위와 같은 질문에는 언제나 오랜 친구 글막힘(writer’s block)이 함께 했고,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다른 책이나 논문들을 찾아 읽는 것뿐이었다. 이런 문헌은 막힌 부분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돌파구’가 되기보다는 이 주제를 다루는 다른 수단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알려주고 그 가능성을 상상하게 돕는 ‘길잡이’의 역할을 해준다. 특히 올해의 글막힘에 많이 도움이 되었던 책은 철학자나 심리학자의 창의성에 관한 문헌보다는 다른 분야의 문헌들이었다.
아직도 틈틈이 참고하는 책은 사무엘 프랭클린(Samuel W. Franklin)의 The Cult of Creativity이다.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문 뉴스 웹사이트를 보다가 창의성에 관한 새로운 책이 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 책 리뷰를 보니 읽어볼 만한 것 같아서 도서관에 신청했다. 저자에 따르면, 창의성이 미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는 것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크게 (1) 1950년대 이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창의성에 관한 심리학 논의의 증가와 더불어 (2) 당시 교육계, 기업계에서 창의성을 직원이나 학생이 함양해야 하는 자질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책은 이 두 가지 요인을 챕터별로 번갈아가면서 소개한다. 한 챕터에서는 1950-60년대에 심리학자들이 창의성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이들이 창의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배경을 설명해 주고, 그다음 챕터에서는 기업에서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브레인스토밍 구루들이 창의성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는지, 이런 말들이 당시의 미국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준다.
프랭클린이 책을 통해서 강조하는 핵심은 창의성이란 특정한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그 당시 사회의 여러 요구 사항이 반영되어서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창의성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에서 상충하는 요구사항이 빚어낸 간극과 긴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길포드는 창의성이 소련과의 과학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자유로운 사고 역량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런 사고 역량이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작은 창의적 수행을 하게 해 준다고 보았다. 하지만 일상적 맥락의 창의적 수행과 과학 기술 경쟁에서 승리를 이끄는 기술이라는 두 결과물 사이에는 아주 큰 ‘간극’이 있다. 어떻게 이것이 ‘단일한 자질’의 결과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프랭클린은 이러한 간극이 창의성을 여러 맥락에서 활용가능한 실용적인 자질로 정립해야 한다는 요구(천재성과는 다른 창의성)와 그래도 창의성은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요구(다른 평범한 심리적 역량과는 다른 창의성)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매슬로우는 길포드에 반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성격, 다른 것과 새로운 것에 이끌리고 즐거움을 얻는 성향으로 여겼다. 그는 창의성을 소수만이 타고나는 특별한 자질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그럼에도 매슬로우가 창의성을 설명할 때 주요하게 끌어들이는 인물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이며, 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창작에 관한 통찰을 얻는 순간에 대한 경험이 낭만적인 언어로 기술되어 있다. 매슬로우도 창의성은 천재성과는 달라야 하지만 또 너무 평범해서는 안된다는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던 것이다.
이런 긴장은 오늘날의 창의성에 대한 심리학 문헌들에서도 계속된다. 긴장을 유발하는 요구들만 50-60년대와는 다를 뿐이다. 첫 번째 요구는 창의성을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 무언가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창의성을 개인이 지닌 여러 가지 심리적 능력들(특정한 분야의 관습이나 지식,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인지적 전략, 균형 잡힌 동기와 정서적 상태)의 작용 결과로 이해함으로써 조절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 두 번째의 요구가 더 힘이 세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첫 번째 요구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도 사실은 ‘창의성과 연관된 심리적 능력들’이 중심에 놓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의 창의성 연구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질문도 결국은 ‘이런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조건이 무엇이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는 혁신을 강조하는 기업이나 조직의 맥락에서 주로 활용되지만 스스로를 경쟁력 있는 인재로 만들기 위한 자기 계발의 논리를 구성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심리학의 창의성에 대한 연구에 이러한 긴장이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뤄진 모든 심리학 연구들이 거짓 연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긴장을 토대로 창의성에 대한 심리학 연구가 갖는 방향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 볼 수는 있으며, 적어도 심리학의 연구만으로 창의성에 관한 모든 의문들을 철저하게 다루지는 못한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두 번째로 길잡이가 되었던 책은 작년에 출판된 제시 싱걸(Jesse Singal)의 『손쉬운 해결책: 자기계발 심리학은 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신해경 옮김)이다. 이 책은 동네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책이다. 창의성에 대해서 직접 다루지 않지만, 파워 포즈, 그릿, 넛지, 긍정심리학 등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주요한 심리학 개념들을 다룬다. 요점은 파워포즈, 그릿, 넛지, 긍정적인 마음가짐의 효과는 연구를 통해서 확인된 결과에 비해서 과장되어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 챕터 별로 이 개념들이 사람들에게 특별히 널리 알려지고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먼저 긍정심리학이나 자존감의 중요성처럼 효과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심리학 주장을 바탕으로 교육 정책, 군인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이 주장들이 자기 계발 업계라는 더 넓은 풀로 흘러들어 간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연구의 통계적 유의미성 자체가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를 홍보하는 스토리의 호소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그릿은 애초에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릿이 지능과 성실성과 정말로 구분되는 심리적 자질인지, 그리고 그 두 척도에 비해서 학업 성취도에 있어서 더 나은 예측력을 갖는지도 타당하게 입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성실성도 지능도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언어적 포장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기에 그릿은 자기 계발 업계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그릿에 관한 챕터를 읽으면서 창의성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인기를 얻게 된 개념이 아닐까 생각했다. 창의성은 애초에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기도 했고, 소련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기실현을 위해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터에서 주체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중요하다는 매력적인 홍보문구도 갖고 있다. 오늘날 창의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저런 홍보문구에 얼마나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문구들에 힘입어 창의성에 대한 심리학의 연구가 오랜 시간 동안 사회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이제는 심리학자들이 창의성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와 상관없이 창의성은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자리 잡혔다는 점이다.
나는 창의성이 실재하는 심리적 자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의성 자체가 허상이라거나 창의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nonsense) 생각하지는 않는다. 창의성이 실재하는 심리적 자질이라는 점을 거부한다고 해서,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현상이 있으며, 그 개념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이 있다는 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창의성이라는 개념의 역할과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조금더 명확하게 함으로써, 창의성은 매력적인 홍보문구들로 포장된 현대인의 필수 스탯이 아니라 ‘중요하지만 간과되어 왔던 사회적 가치’들을 발견하기 위한 지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연결지점을 찾고 엮어내기.
내가 논문에서 직접 인용하고 참조하는 텍스트들(철학, 심리학)만 읽었을 때 보다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 나에게 필요한 메타적 관점을 얻을 수 있었고, 심리학의 텍스트들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조금 더 분명해질 수 있었다. 더 큰 맥락에서 내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 질지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내 문제의식과 연결해 볼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가능한 입장들을 나눠보고 이 중 하나를 옹호하는 논증을 만들어가는 전형적인 철학적 글쓰기의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은 더 큰 맥락에서 이뤄지는 공부에 가깝다. 내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논의에 나를 노출시키고, 그와 관련해서 시도 때도 없이 드는 질문과 생각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에 대한 쉽지 않은 고민들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이다. 내 학위논문은 여전히 철학적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서 정리할 수 있는 생각들을 담은 결과물이 될 것이고, 앞으로 내가 생산할 글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어떤 주제를 연구하든지 간에, 항상 더 큰 맥락에서 그 주제가 논의되는 방식을 참고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었던 에바 페더 키테이(Eva Feder Kittay)의 『의존을 배우다: 어느 철학자가 인지장애를 가진 딸을 보살피며 배운것』(김준혁 옮김)는 더 큰 맥락의 공부를 바탕으로 선택적 재생산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논증하고 배려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윤리 이론의 얼개를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철학 이론의 틀 안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학, 장애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을 참고해서 자신의 이론의 토대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기 위해서 다른 입장보다 자신이 여러 지점에서 낫다는 점을 드러내고, 다른 입장이 그럴듯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데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지 않는다. 다른 입장을 완벽하게 논파하지 않는 철학 이론은 뭔가 완벽하지 않다거나 엄밀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흔히 철학답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났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오히려 철학에 더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