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연구자의 삶,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늦은 나이에 대학에 편입한 '나'가 등장한다. 사회 생활을 경험한 그는 "환상을 갖고" 다시 대학교에 편입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책이나 자료를 읽으면서 골몰하는 시간, 배운 내용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언어로 이해는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더 가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주인공은 은행에서 일하면서, 스스로를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라고 느꼈지만, 책상 앞에 앉을 때면, "투명망토를 두른 기분", 사회에서 받은 상처의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느낌"을 가졌다. 자신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정확한 표현으로 조곤조곤 기술하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가 느꼈을 옅은 기쁨이 소설을 읽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주인공은 선생님이 어떤 삶의 자취를 밟아왔을지 궁금해하고, 더 알아 가려고 한다. 선생님이 쓴 에세이를 사서 읽었고, 주인공이 사는 용산구에서 선생님이 오랫동안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선생님과 강의실 밖에서 더 많은 소재들을 갖고 이야기한다. 수업에서 쓰는 글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지역의 구체적인 장소들에 대한 감상을 나눈다. 단골 서점에 자리하던 오래된 소파와 서점의 무심한 주인에게서 느꼈던 편안함에서 부터 재개발과 그로 인한 참사에 이르기까지, 주인공과 선생님은 삶의 일정 부분을 용산구에서 보내면서 경험한 사건과 장소들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이 소설은 용산 참사를 다루지만, 도시 개발의 모순이나 용산 참사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파고들지는 않는다. 대신, 소설은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태도, 마음 가짐을 묘사한다. 주인공과 선생님은 "그 때", 무장 경찰들이 농성장을 폭력적으로 진압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논문을 쓰고 있었고, 주인공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만 교환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진다. 자신에게는 그 날의 사건에 대해 받은 충격에 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는 느낌"이 대화의 공백을 채운다.

'나에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는 부끄러움'은 주인공이 수업시간에 에세이를 쓸 때에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용산 지역의 구체적인 장소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도시의 한 단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 장소들이 왜 사라졌는지 그 장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이 도시 개발과 참사와 관련해서 느꼈던 감정들을 그대로 글에 담지 못했다는 점, 감상적인 글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는 점을 부끄러워 한다. 나에 대한 부끄러움은 내가 만들어낸 것에 대한 또다른 부끄러움을 낳는다. 자격이 없는 내가 뭔가를 해도 그것이 유의미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내가 한 것과 관계 없이 돌아가는 현실에서 매일 매일 쌓이는 절망. 내가 그런 현실을 뒤집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라는 좌절. 그럼에도 현생 유지를 위해서 꾸준히 뭔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부끄러운 이의 삶에는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스며든다.

주인공에게 선생님은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연구자였다. 처음부터 대학원을 염두에 두고 편입한 주인공은 선생님이 자신을 준비된 연구자로 보기를 바랐다. 토론에서 카리스마 있게 나서지 못했을 때, 주인공은 선생님이 자신을 나약한 사람으로 볼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종강 모임에서 주인공이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의 표정이 굳자, 그런 반응은 이미 겪어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몸을 짓누르는 무기력함과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조금 앞선 곳에 있는 롤모델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아주 희미한 빛"은 롤모델이 어둠 속에서 내뿜는 빛,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빛이다.

주인공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위를 취득하고 본격적인 연구, 강의 생활을 시작할 즈음, 선생님은 학계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주인공은 이 질문을 붙잡고 불안을 머금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인공은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강의를 선생님의 강의와 비교하고 자신이 학생의 위치에서 선생님을 봤을 때 했던 생각과 말들을 곱씹는다. 그 때의 선생님은 주인공의 선명한 기억을 통해서 희미한 빛을 뿜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

나는 대체로는 닥친 일들을 처리하면서 살아가지만, 가끔은 어떻게 하면 연구자로 길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그냥 살아야지 뭐...너무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할 일이나 하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당장의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을 막고 실용적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미루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은 학교 안팎에서 뭔가를 하긴 하지만, 이것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다독여주는 것은 주인공이 선생님에 대해서 느꼈던 내적 친밀감이다.

주인공과 선생님은 소설에서 내내 느슨한 관계를 유지한다. 한 학기의 수업이 끝난 이후에는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대부분의 대화는 수업 시간을 매개로 한 모임이나 서울 한복판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뤄졌고, 둘은 그 이상으로 서로의 삶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선생님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과 같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점, 자신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의 길을 묵묵하게 가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소설 전반에는 내적 친밀감을 기반으로 한 은근한 다정함이 녹아있다. 선생님도 주인공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서, 수업 중에 갑자기 생리가 터진 주인공에게 선생님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여성들이 공유하는 예측불가능한 생리 경험은, 주인공과 선생님이 서로에 대해 가졌던 내적 친밀감을 확인하고 이를 서로를 향해서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함께 '대단한 일'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감정을 갖게 하는 사람들은 소중하다. 내적 친밀감을 기반으로 한 느슨한 관계는, 사회적 역할들로 묶여있는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씨를 쓰던 느낌. 그녀의 낮은 톤의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서 퍼져 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과제로 내준 에세이들이 좋았고, 혼자 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 속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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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유니버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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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미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1): 예술과 관련된 주제들.(22.02.07 책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