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의 『고고심령학자』는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되는가? : 분석미학적 접근의 시도.

*소설 내용이 상당히 언급되므로, 소설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소설을 읽은 후에 읽으시길 권합니다.

* 같은 글을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에도 업로드했습니다.(https://colleague.co.kr/forum/view/537003)

들어가며

『고고심령학자』는 과학 소설(Science Fiction)로 분류되지만, 심령 현상을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과학 소설의 외양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 소설이라고 하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이 등장한 인공물 혹은 인공 생명체, 예를 들면 신약이나 우주 정거장,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중심이 되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같은 작가가 쓴 『타워』에서는, 엘리베이터가 교통수단이 되는 674층짜리 빌딩이자 국가인 빈스토크가 바로 그 새로운 인공물로 등장하고, 『첫 숨』에서는, 지구와는 독립적인 정치적, 군사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첫숨'이라는 인공 콜로니가 등장한다. 비과학적인, 심지어 반과학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심령 현상을 소재로 한 소설이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바로 소설의 등장인물인 연구자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고고심령학자』에는 고고심령학이라는 가상의 학문이 등장하는데, 이 학문은 직접적인 해답을 찾기 어려운 역사적인 질문들을 심령현상을 바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에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설명과 논증을 전개하는 학문들, 사회과학 및 인문학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고심령학 연구자들이 던지는 질문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이들의 고민이 이 소설을 과학 소설로 만들어준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필자도 연구자로서 이 해석을 너무 매력적으로 읽었고,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연구자로서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들에 공감이 많이 가기도 했다. 가상의 학문이라고 해서 학문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대학원생이 있는 것은 아니더라. 소설 속의 대학원생들은 엄격한 교수에 지쳐있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연구를 계속하는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하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고고심령학 연구도 정부의 예산을 따내서 이뤄진다는 점, 예산을 따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현실적이었다.

그렇지만 소설에 묘사된 연구자의 삶에만 의존해서, 이 소설이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되는지 설명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소설에 묘사된 연구자들의 삶이 갖는 핍진성 때문이다. 소설 속 연구자들의 삶이 현실 속 연구자들의 삶과 비슷하다면, 이 소설은 그냥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고고심령학이라는 가상의 학문을 전공한다는 차이는 아주 사소한 차이처럼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고고심령학 연구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내러티브에서 중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하는 활동들은 서울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심령 현상인 '요새 빙의'를 향한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미지의 현상은 바로 이 소설 속 세계가 현실 세계와 구분되게 갖는 새로운 특징이기도 하다. 요새같은 건물이 영혼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새로웠고, 빙의도 개체 단위로만 일어난다고 생각했지 하나의 지역에 빙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새 빙의'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 소설이 과학 소설이 되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새로움을 지니는 이 소설이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되는지 분석하는 것은, 이 소설 뿐만 아니라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 개념 자체를 더 자세하게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 :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

다르코 수빈(Darko Suvin)은 과학 소설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진행하면서 과학 소설의 필요 충분 조건을 제시했는데, 노붐(the novum; 라틴어로 새로운 특징이라는 의미)과 인지적 정당화(cognitive validation)가 바로 그 특징들이다. (Terrone, 2021, p.16) 필요 충분 조건이라는 말은, 수빈이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를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모든 소설 작품들이 가져야만 하는 특징으로 보았다는 점, 한 소설이 이 특징들을 갖는다면 과학 소설로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그는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를 통해서 과학 소설의 본질적 정의, 모든 과학 소설이 가질 뿐만 아니라, 과학 소설을 다른 장르의 소설과 구분해주는 특징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전개된 예술 정의의 불가능성과 관련된 논의를 고려한다면, 과학 소설에 대한 본질적 정의의 시도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수 밖에 없다. 본질적 정의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러한 정의는 항상 반례들에 열려있는 것이 아닌지, 본질적 정의의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닌지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 소설 내의 수많은 하위 장르들을 생각하면, 필요 충분 조건을 고정하는 본질적 정의는 과학 소설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강압적으로 나누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글의 목적은 『고고심령학자』라는 소설이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적 정의가 가능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이 장르를 규정할 수 있는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본질적 정의가 끊임없이 반례에 열려있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결코 완수될 수 없는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필자는 이 시도가 아예 쓸모 없는 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적 정의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작품들이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들이 이러한 공통의 특징을 어떤 식으로 다르게 구현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작품이 어떤 이유에서 과학 소설이라고 불리는지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리코 테로네(Enrico Terrone)는 과학 소설을 필요 충분 조건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수빈이 제시한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는 많은 과학 소설들이 갖는 표준적인(standard) 특징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언급한다. (Terrone, 2021, p.22) 여기에서 한 장르의 표준적인 특징은 개별 작품이 이 특징을 가졌을 경우 그 작품을 그 장르에 속할 경향성을 더 높여주는 그러한 특징이다. (Friend, 2012, p. 188.) 그는 과학 소설에 표준적인 특징들로 간주되는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과학 소설 관행에 참여하는 이들(작가나 독자들)의 기대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시대에 따라서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 하에서 겹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클러스터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질 수 있다고 보았는데,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는 클러스터들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꽤나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고고심령학자』의 노붐

노붐이란 "작가의 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것"을 의미하는데, 이 중 작가의 시대에 없다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점은, 이 소설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판정하기 위한 맥락을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로 옮겨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Terrone, 2021, p.24 ) 예를 들어, 20세기 초에 나왔던 과학 소설의 새로운 기술은 이미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구현된 것도 있고, 그렇기에 더이상 새롭다고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탐사를 위해 우주비행사를 달이나 우주로 보내는 것이나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을 달로 보낼 수 있는 우주선이 아직 구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남아있던 시대에는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는 것 또한 새로운 것, 노붐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소재를 가진 과학 소설이 쓰여졌다. 반면 오늘날의 과학 소설의 스케일은 인간이 달에 방문하는 것을 넘어선다. 우주 콜로니를 만든다던지, 우주 정거장에서 티켓으로 태양계 밖의 행성들을 여행하는 것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노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의해야할 것은, 과학 소설의 노붐이 반드시 과학 기술 영역에서 작가의 시대에 없는 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밀한 과학 이론이나 기술적 지식을 전제로 상상한 새로운 것만이 과학 소설의 노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오해이다. 이러한 노붐을 갖는 과학 소설의 하위 장르는 '하드 SF'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과학 소설 안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들이 있다. 지구에 운석이 충돌해서 혹은 기후 위기로 인간이 살수 있는 땅이 점점 좁아지면서 생기는 일들, 핵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생기는 일들을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인류의 개조로 인해서 혹은 모종의 자연발생적 원인으로 등장한 초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초인 소설', 그리고 근미래의 디스토피아 사회를 다룬 소설은 '사회과학 소설'도 과학 소설의 한 장르이다. 이러한 하위 장르들도 포괄하기 위해서 노붐의 의미는 새로운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없었던 생물, 인공물, 사회적 제도, 자연 현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노붐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된다면, 『고고심령학자』가 왜 과학 소설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고고심령학자』에도 이 시대에 없는 기술이 등장하기도 한다.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심령 현상을 측정해서 시각화해주는 장치라던지, 서재에 책이 놓여있는 모습을 그대로 스캔해서 만든 홀로그램 가상 공간 등은, 현대에도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술들이 『고고심령학자』의 노붐이 아닌 이유는 이 기술들이 서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고심령학자』에서 이러한 기술들의 존재가 소설 속 세계와 주인공들의 삶에서 특별히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즉, 과학 소설의 노붐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것'이어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사의 전개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필요하다.

노붐의 이러한 조건을 고려했을 때, 『고고심령학자』의 노붐은 단연 '요새 빙의'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어떤 영적 기운도 없고 가위도 잘 안눌리는 체질이라 빙의를 겪은 적도 본적도 없다. 물론 그와 비스무리한 것을 경험해봤다고 하더라도 '빙의가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우리 세계에서 빙의란 그 존재가 불확실한 것이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다양한 내러티브들(공포 영화나 구전되는 무서운 이야기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빙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재구성해볼 수 있다. 빙의는 보통 동물이나 인간 등 한 개체의 혼이 사람의 신체에 들어가면서 일어난다. 물론 영혼의 굴곡진 삶이 원한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 혼은 특정한 공간, 건물 전체에 빙의해서 그 건물 전체를 귀신들린 집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지만, 아무튼 빙의되는 영혼은 하나의 생명체의 혼, 즉 동물이나 인간의 것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고고심령학자』의 '요새빙의'는 요새의 혼, 말하자면 요새의 기억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도시에 빙의하는 현상이다. 도시가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다는 말은 도시의 중심 역할을 할만한 요충지가 두 개 이상이 있다는 의미인데, 북한산 아래 경복궁이 위치한 종로 일대가 한 곳이고, 남산 아래에 한강을 끼고 있는 용산 일대가 또 한 곳이다. 요새 빙의는 그 중 한 지역인 용산 일대에 요새를 구성하는 검은 벽들이 나타나면서 일어난다. 특정한 지역에 요새가 빙의되기 시작하면, 요새의 거대한 검은 벽들이 드문드문 그 지역에 등장한다. 처음에 그 벽은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들을 가로지른다. 이 때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그 벽이 원래 있었던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즉 갑자기 벽이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원래 이 길로는 못갔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새 빙의는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에게도 직접 관찰되기가 어렵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도 그 벽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움직이고, 이후에 자신이 왜 다른 길로 왔는지 그 이유를 되짚어보면서 자신이 요새 빙의의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빙의되는 요새의 형태가 완성되어가면서, 군데 군데 산발적으로 나타났던 벽들이 촘촘하게 모여 사람들이 주거하는 공간까지 가로지르면서 발생한다. 벽은 집에 들어와서 사람들의 신체를 가로지르기도 했는데, 이 때 사람들은 신체 일부분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벽에 파묻힌 신체의 일부를 원래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요새의 검은 벽이 실제로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 벽을 그냥 통과할 수 있는 홀로그램 영상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이처럼 요새의 벽이 인간의 현실 인식이나 신체 감각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요새 빙의가 완성되었을 때, 그 벽에 파묻힌 사람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재난에 가까운 수준일 것이다.

요새 빙의는 우리가 보통 빙의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새 빙의의 존재 및 전개 양상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사고 및 행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고고심령학자』의 노붐이라고 불릴만하다. 소설에는 요새 빙의 외에도 혼령과 관련된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혼령에 홀려서 좁은 시야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 혼령에 의한 것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 혼령에 의한 것임이 분명한 책 분실 사건과 사고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어떤 혼령이 사람들을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지, 어떤 혼령이 주인공을 홀렸는지 등은 낱낱이 설명되지 않는다. 혼령이 얽힌 이런 사건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힘들과 법칙들이 이 세계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장치 역할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요새 빙의라는 새로운 현상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소설 전반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중간 질문 : 판타지 소설의 노붐?

지금까지 과학 소설의 노붐이 반드시 과학 기술 영역의 새로운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 『고고심령학자』는 '요새빙의'라는 노붐을 갖는다는 점에서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 두 개 중 한 가지를 공유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과학 기술 영역을 벗어나 있는 새로운 것도 노붐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심령 현상 차원에서의 새로움인 '요새 빙의'도 노붐이 될 수 있다면, 마법, 주술 영역에서의 새로움을 포함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마법 소설 『해리포터』시리즈도 과학 소설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미리 입장을 밝혀두고, 과학 소설의 다음 특징인 인지적 정당화로 넘어가겠다.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이러한 소설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이 노붐이라고 할 수 있는가? (2)이러한 소설들이 노붐 외에도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을 충분히 공유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일단 노붐의 확장된 의미를 고려한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물론 『해리포터』에 나오는 모든 마법적인 것들이 노붐은 아니다. 전형적인 마법사와 마녀의 착장을 비롯해서, 순간이동 마법, 동물 변신 마법, 트롤, 도깨비 등은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형적인 빙의 현상이 우리에게 새롭지 않은 것처럼,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법 생명체나 마법 현상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판타지 소설이건 과학 소설이건, 소설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사람들이 가상의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방식에' 의존해서 소설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는 기존의 방식이 있으며, 판타지 소설의 세계는 부분적으로 그러한 이해를 기초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것들은 단순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붐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중 일부만 노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붐은 단순히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서사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즉, '온갖 맛이 나는 강낭콩 젤리'는 『해리포터』의 재미있고 새로운 발명품이지만, 노붐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강낭콩 젤리를 개발한 마법사 이야기를 담은 스핀오프가 나오면 또 모를까..) 『해리포터』의 서사 안에도 수많은 노붐이 있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것만 말해보자면, '펜시브 마법', '집요정해방전선' 같은 것은 노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서사의 중심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 이제 판타지 소설도 노붐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도 과학 소설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인가? 여기에서부터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에 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있고, 이 클러스터가 어떤 특징들로 구성되는지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져왔다고 주장하는 테로네의 입장을 소개했다. 테로네에 따르면, 노붐은 과학 소설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표준적인 특징들 중 하나이다. 만약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에 노붐 외의 다른 특징들도 포함된다면, 판타지 소설이 노붐의 규정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류의 것들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판타지 소설이 다른 표준적 특징들을 갖지 못하기에 과학 소설이 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른 특징 중 하나가 이제 앞으로 살펴보게 될 인지적 정당화이다.

『고고심령학자』의 인지적 정당화

테로네는 인지적 정당화를 소설이 노붐을 다루는 방식 차원에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인지적 정당화란 노붐을 저자의 시대의 과학적 용어들, 적어도 학문과 지식의 합리적인 용어들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Terrone, 2021, p.24.) 노붐이 합리적인 용어들 하에서 정당화되어야만, 감상자가 노붐을 저자의 시대의 사고 체계 하에서 불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소설의 장르에 따라서 그리고 작가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서 노붐을 설명하는 방식과 그에 동원되는 지식의 깊이는 다를 수 있다. 하드SF소설가인 테드 창의 중편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 노붐은 가상 현실 공간에서 키울 수 있는 가상의 생명체들이다. 이 가상 생명체들은 고정된 반응 방식을 갖고 프로그래밍된 아바타 펫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가상 공간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 더이상 접속하지 않거나 그 공간의 서버를 관리하는 회사가 망하면 사라질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이 가상 생명체들에게 가상 공간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그 자체인 것이다. 테드 창은 가상 생명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현대 과학의 개념들을 동원해서 설명하고, 인간이 가상 생명체를 키우는 과정, 가상 생명체가 감정을 지닌 지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현대 철학의 개념들을 동원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가상 생명체를 키우는 두 주인공 사이의 대화나,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서 주로 전달된다. 주인공들의 삶에도 많은 변화(이직, 이혼 등..)가 있지만, 이는 거의 지나가는 사건처럼 언급된다. 소설의 서사는 주인공들이 키우는 가상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주인공들도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하고 대화한다. 주인공들의 설명이 길어지다 보면, 작가가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노붐의 아주 세부적인 부분까지 주인공 혹은 화자의 입을 빌려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테드 창의 소설이 하드SF이기 때문에 갖는 특징이자 그의 소설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반면 모든 과학 소설이 하드SF 같은 인지적 정당화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고심령학자』는 하드SF와는 다른 방식으로 요새 빙의라는 현상을 인지적으로 정당화한다.

『고고심령학자』는 고고심령학을 전공한 세 명의 주인공(조은수, 김은경, 한나 파케노티)을 통해서 요새 빙의를 인지적으로 정당화한다. 즉, 고고심령학 연구자인 주인공들이 요새 빙의라는 현상에 대해서 접근하고 이를 알아가는 방식은 『고고심령학자』의 인지적 정당화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고고심령학은 실제로는 없는 학문인데 이걸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해서 우리 시대의 사고 방식 하에서 요새 빙의가 가능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염두에 둬야할 점은, 고고심령학이 우리 시대의 학문이나 지식 체계에 기대지 않는 완전히 마술같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고심령학은 여러 전공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융합전공으로, 심령현상을 통해서 답하기 어려운 역사적, 인류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으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그 기반에는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자리한다. 즉, 이들이 요새 빙의에 관해서 알아갈 때 사용하는 언어와 방법은 인문학의 언어 및 방법과 비슷하다. 요새 빙의를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이 현상이 주로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어떤 조건을 만족하는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빙의하는 요새에 얽혀있는 혼령들은 무엇이고, 그 혼령들에 얽힌 이야기는 무엇인지, 빙의가 완성되면 그 혼령의 힘이 실제 세계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합리적으로 추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연구자들은 방대한 문헌들을 뒤지고, 현장 조사를 하면서 단서를 찾는다.

"싱가포르에서 얻은 주소는 물론 시작점에 불과했다. 늘 하던대로 해당 지역의 변종 차투랑가 대국을 통해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금방 고수들을 불러 모았다. (…) 코끼리를 추적하는 사냥꾼 입장에서는 그만큼 호의적인 조건도 없다. 문제는 유목민들이 사는 지역의 특수성이었다. 현지인들이 말하는 "이웃동네"라는 것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상식으로는 거의 이웃 은하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위구르에서 시작해 슬금슬금 내몽골 지역까지 넘어가버린 파키노티의 여정은 어느덧 국경 너머 몽골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하지만 네 번째 코끼리를 봤다는 사람이 등장하면 아무리 미심쩍어도 일단은 확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야말로 미심쩍은 증언투성이였지만, 사실 그 정도 목격담말고는 단서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일단은 그 말이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수 밖에 없었다." (pp. 206-207.)

"천문대에서부터 끌고 온 커다란 가방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자료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코끼리에 관한 서사시, 신화, 설화 민담, 역사적인 기록들. 그 중에서도 전쟁에 관한 것들만 추려낸 자료들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 전투 코끼리 부분을 따로 추려낸 것은, 물론 문 박사가 참고 자료 곳곳에 남겨둔 메모 때문이었다. 문 박사의 관심은 고대 코끼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그 시절 코끼리들은 상당수가 왕을 포함한 전사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 문 박사에게 아미타브라는 이름에 관한 힌트를 준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은 전투 코끼리에 관한 시가 모음집 목록 정도에 해당하는 문서를 영어로 번역한 자료였다. 즉 시가 모음집 자체가 아니라 그런 모음집들의 제목을 나열하고 각각의 모음집에 수록된 노래들 중 대표적인 곡들을 소개한 문건을 수집한 사람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었다." (p. 151.)

"출처도 없고 가사도 완전 딱따구리 마요네즈 수준이거든. 그러니까 말이 안된다는 소린데, 원래 외국어였던 것 같아. 몬데그린*이 일어난게 아닌가 싶어. 그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당장 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더 퍼지기 전에 추적해 들어가면 금방 출처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야. 이래 봬도 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여서 소나무에 유에프오 프로젝트에서 연구해놓은 것도 조금은 적용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현장에 있던 팀들이 직접 기록해놓은 최신 정보들도 없지 않으니까. (...) 지금 이 노래는 고고심령학 현상이 분명해. 왜냐하면 그 노래 듣고 눈물 흘린 사람이 너 하나는 아니거든. 애들이 반응해. 엉엉 우는 애들도 있고, 꿈에서 뭔가 봤다는 애들도 있어. (...) 그래서 결국 출처가 문젠데, 출처에 대한 증언이 나왔어.(...) 세 명이 진술했는데, 그 중 두 명은 사실이 아니야. 다른 애가 말한걸 자기가 목격한 걸로 착각한 거지. 애들은 자주 그러니까. 오리지널 소스는 한명이야. 적어도 얘 하나는 진짜로 자기가 본 걸 이야기하는 것 같아. 인상착의를 설명해준 적이 있는데, 당일에 바로 들은게 아니어서 인상착의 부분은 기억이 오염된 것 같아. 나중에 집에 가서 상상한 걸 기억으로 착각해서 나한테 들려준 거지. 그래도 하나는 분명해. " (pp.123-124.)

* 외국어의 노랫말이나 문장을 모어로 잘못들으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가진 노랫말이나 문장.

위에서 부터 순서대로 한나 파키노티, 조은수, 그리고 김은경의 말이다. 세 연구자들은 처음부터 의기투합해서 함께 요새 빙의에 대해서 알아가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파케노티는 서울에서 요새 빙의 현상을 보고하는 세미나에 참석해서 조은수를 처음으로 만난 다음, 차투랑가 장기에서 코끼리 말이 움직이는 방식을 연구하러 떠난 후, 서울로 돌아오지 않는다. 조은수도 스승인 문인지 박사의 천문대 연구실을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기 때문에, 천문대와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생활한다. 김은경은 자신이 예전에 참여한 몬데그린 연구 프로젝트인 '소나무에 유에프오'가 흐지부지 끝난 것을 아쉬워하고, 혼자서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조사를 한다. 이렇게 세 연구자는 각자의 영역으로 흩어지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서 요새 빙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키워드들과 그 키워드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줄 단서들을 조금씩 모은다. 그리고 때때로 한나 파케노티와 조은수가 대화하면서, 아니면 김은경과 조은수가 대화하면서 요새 빙의에 관련된 단서들을 공유한다. 이 단서들이 만나면서, 요새 빙의의 징조가 과거에도 있었다는 점, 요새 빙의에 얽힌 아미타브라는 이름의 코끼리 혼령이 있다는 점, 그 코끼리가 천문대의 1500년된 아이 혼령과 관련이 있다는 점, 그 아이와 코끼리 혼령 사이에 얽힌 이야기가 차례로 밝혀진다.

『고고심령학자』는 주인공들의 대화와 사고를 통해서 요새 빙의 현상이 고고심령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들의 탐구가 요새 빙의의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연구자들은 인문학자들이고, 앞서 언급했듯, 빙의 등의 심령 현상의 자연적인 원인은 소설 속 세계에서 낱낱이 해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심령 현상은 과거의 한 시대에 존재했던 무언가의 혼령이 나타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 혼령이 어떤 시대에서 어떤 삶을 거치면서 살아왔는지를 역사적 기록과 구전되는 설화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파악한다. 그리고 혼령이 어떤 좌표에 위치하는지를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다시 혼령의 말이나 행동 등 존재 방식이 우리가 현재 지닌 역사와 인류에 대한 이해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 숙고하는 것이 고고심령학이 심령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좋은 고고심령학자가 된다는 것은 촘촘한 눈금을 갖게 되는 일을 의미했다. 눈금이 딱 두 개인 목격자가 귀신이다 아니다만 간신히 판단할 때, 훈련받은 연구원은 대여섯개 이상의 좌표평면에 그려져있는 백개 이상의 눈금으로 혼령의 좌표를 세심하게 결정한다. 그것이 문 박사나 은수의 방식이었다. 아무나 훌륭한 관찰자가 될 수 없고, 대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전문가가 발굴 현장에서 갖는 가치는 다른 지표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p.170.)

중간 질문 2: 판타지 소설의 인지적 정당화?

앞서 판타지 소설과 관련해서 들었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자연 과학이 아닌 학문의 언어와 지식 또한 노붐을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다소 학구적인 분위기의 판타지 소설은 과학 소설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서도 고고심령학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 등장하지만, 그 학문은 고고심령학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학문들에 기반을 둘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예로 든 『해리포터』에서 노붐이 그러한 학문의 언어나 방법에 의해서 설명되는 경우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예를 들면, '집요정해방전선'은, 저자의 시대에서 이용가능했던 인권과 노동권 등의 개념으로 인지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당화의 중심에는 집요정해방전선을 만들고 집요정해방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헤르미온느라는 캐릭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작중 캐릭터가 집요정해방전선을 인지적으로 정당화한다고 해도, 이 점이 『해리포터』를 과학 소설로 보는 것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는 대부분의 과학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긴 하지만, 한 소설이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를 갖는다고 해서, 과학 소설이 되기에 '항상 충분한' 것도 아니고, 과학 소설이 되기 위해서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한 소설이 특정한 장르에 표준적인 특징을 가졌다면 그 작품은 그 장르에 속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라는 두 축을 경유해서, 『고고심령학자』가 어떻게 이런 특징들을 갖는지 설명했고, 『고고심령학자』가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라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 때문에 이 소설이 과학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고심령학자』를 과학 소설로 보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그 소설이 갖는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별히 『고고심령학자』를 과학 소설로 간주하는 것을 저지하는 '과학 소설에 반표준적인(contra-standard) 특징들'을 『고고심령학자』가 갖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소설에 등장하는 노붐 대부분이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원리들, 마법적인 물체의 작동 방식이나 마법적인 생명체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가능한 것으로 설명되는 것을 과학 소설에 반표준적인 특징의 사례로 생각할 수 있다. 한 소설이 판타지 소설 잡지에서 발표되었다는 제도적인 특징 등도 한 소설을 과학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하는 반표준적인 특징의 사례가 될 수 있다. (Terrone, 2021, p.23) 물론 한 소설이 이러한 반표준적인 특징들을 가졌다고 해서, 그 소설이 과학 소설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표준적인 특징이건 반표준적인 특징이건 이 소설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항상 충분하게 결정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작품이 과학 소설 장르에 표준적인 특징들과 반표준적인 특징들을 얼마나 가졌는지를 견주어보고, 이 작품을 과학 소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개별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고려했을 때 『해리포터』는 그것을 과학 소설이라고 보는데 적합하지 않게 만드는 특징들, 과학 소설에 반표준적인 특징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집요정해방전선'이라는 운동은 흥미로운 노붐이고, 헤르미온느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작품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긴 했지만, 『해리포터』의 방대한 서사 속에는 인지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노붐들, 혹은 노붐이 아닌 마법적인 생명체 및 물체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며, 이것들은 대부분 저자가 만들어낸 마법적인 생명체의 존재 방식이나 마법적인 물체의 작동 방식, 혹은 마법 판타지 소설 장르에서 전형적으로 전제되는 배경에 의해서 설명된다. 그렇기에 '집요정해방전선'이 우리 시대의 개념들로 정당화되고, 결과적으로 현실의 노동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떤 빛을 던져준다고 해도, 그것이 『해리포터』를 과학소설로 보는 것을 타당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나가며 : 과학 소설의 '희미한' 경계.

지금까지 『고고심령학자』가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라는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을 지님으로써 과학 소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떤 소설이 노붐을 갖는다고 해서 무조건 과학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어떤 소설에서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를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소설이 과학 소설에 반표준적인 특징들을 너무 많이 갖는다면, 그 소설을 과학 소설로 보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테로네의 과학 소설 장르에 대한 주장을 참조해서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전제(이는 반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도 마찬가지일 것) , 장르가 지닌 역사성에 대한 지지를 전제로 『고고심령학자』가 어떻게 과학 소설이 되는지 논의했다.

하지만, 과학 소설의 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는 점은, 결국 '과학 소설'과 '과학 소설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주는 절대적 기준이 없으며, 시대에 따라서 이러저리 변하는 희미한 경계선만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소설들은 정확하게 어떤 장르에 속하지를 분명하게 말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동시에 여러 장르에 속하는 소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정세랑 작가의 장편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도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하는지가 애매하다. 저탄소 생활을 추구하는 광물 외계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종족의 본성이나 삶의 방식과 관련된 인지적 정당화보다는 광물 외계인과 한아의 특별한 사랑이 소설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구에서 한아뿐』은 노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SF적 요소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판타지 소설과 로맨스 소설이라는 장르가 그 소설에 더 잘 어울리는 이름 같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노붐과 인지적 정당화를 과학 소설의 표준적 특징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하긴 했지만,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사를 더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이 외에도 더 많은 특징들이 표준적인 특징으로 언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학 소설이 갖는 다른 중요한 특징들을 더 다양하게 밝힐 수 있다면, 이는 희미한 경계에 걸쳐있는 소설에 대한 섬세한 논의의 장을 열 수 있다. 이 또한 분석 미학에서 특정한 장르의 본성과 가치를 연구할 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과학 소설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있다. 개별 작품을 특정한 장르로 간주하게 하는 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있고, 특정한 장르로의 분류를 저지하는 반표준적인 특징들의 클러스터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클러스터들이 시대의 변화와 감상자들의 기대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은, 장르라는 개념이 작동하는 기초적인 방식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과학 소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필자는 장르 개념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감상자가 개별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신이 중요한 것으로 발견한 특징들을 사유의 형태로 구체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배명훈, 『고고심령학자』, 북하우스, 2017.

Stacie Friend, "Fiction as a Genre"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vol. 107, pp. 179-209.

Enrico Terrone, "Science Fiction as Genre",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 79, 2021, pp.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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