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월의 일들: 새로운 학기와 생각들.

새로운 학기

1월에 종강을 기뻐하는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방학이 참 짧다. 1.5배속으로 지나간 것 같다. 벌써 개강을 했고, 또 개강한지도 한달이 지났다. 방학 동안에는 교수법 워크숍도 듣고, 읽고 싶었던 논문을 몇 편 읽고, 이번해 안에 투고해야하는 논문을 수정했고 수정을 하면서 참고문헌에 있는 논문들도 다시 읽었다.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 작업은 올스톱. 다음 방학의 리스트로 넘어갔다. 사실 나는 지금 추가 학기를 다니고 있다. 박사과정에서 이수해야 하는 학점은 석사 과정보다 많지만, 정규학기는 석사과정이랑 똑같이 4학기이다. 그래서 정규 학기 안에 모든 학점을 이수하려면, 한 학기에 세 과목은 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재작년에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고, 도저히 세 과목들으면서 다닐 자신이 없어서 매 학기 두 과목만 들었다.

지금은 밖의 일 때문에 바쁘지 않으니 세 과목 들어볼 생각도 잠깐 했었다. 그러면 마지막 학기에 과목을 적게 듣고 등록금도 좀 적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만 하다 말았고 결국 이번 학기에도 두 과목을 듣고 있다. 두 과목 듣는다고 시간 여유가 더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읽을 텍스트들은 수업을 두 개 듣건 세 개 듣건 많고, 그 와중에는 이해해야할 어려운 논의들도 많다. 벌써부터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진이 빠지는 논문들도 몇개 마주했다. 이건 단지 그 논문이 외국어로 쓰여졌다는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그냥 해야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주제의 이런 논문 읽겠니.

현상적 믿음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 중에는 자기 지식(Self-Knowledge)과 관련된 문헌들을 읽는 수업이 있다. 주제는 자기 지식이지만, 인식론과 심리철학, 언어 철학의 전문적인 논의들을 전제로 하기에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차다. 지금 읽고 있는 논문은 현상적 믿음에 관한 차머스의 논문인데, 내가 어떤 현상적 속성을 예화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믿음을 의미한다. 이 논문이 어려운 이유는, 차머스가 논의하는 현상적 믿음이 '붉음'이나 '고통'처럼, 감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들로 정확하게 포착되지 않는 현상적 속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붉음'같은 표현은 전형적인 붉은 대상(ex.토마토)이 나 혹은 다른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야기하는 경험의 현상적 속성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때 시세포의 이상으로 붉은 색조를 볼 수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붉음'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면서, '붉음'이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대상이 그들에게 전형적으로 어떤 경험을 주는지 알 수 있고, 자신에게 이러한 경험을 유발하는 것을 '붉다'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그가 붉은 것들을 보면서 어떤 경험을 가질 수 있고, ‘붉다’는 개념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붉은 색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갖는 시각적 경험과는 다른 현상적 속성을 가진 경험을 가질 것이다. 차머스가 주로 논의하는 현상적 믿음은, 바로 공적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어려운, 나의 감각적 경험에 내재한 현상적 속성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믿음이다.

__120_1.png

뭔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지 출처 : 모죠의 일지 120화 "리포트 쓰는 만화"

그렇기 때문에 논의를 읽으면서도 뭔가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면서 나아간다기 보다는, 옆에 세워진 가드레일에 페인트로 가느다란 선을 남기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철학 텍스트를 읽으면서 고속도로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어렵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머스가 인간 경험의 이러한 내재적인 현상적 속성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이 속성이 나의 뇌와 신체에 대한 실리콘 복제물들과 나라는 인간을 구분해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내러티브 예술을 통한 현상적 지식

차머스의 현상적 믿음에 관한 논의를 읽으면서 내 석사 논문 주제와 관련된 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내러티브가 있는 예술(소설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 저런 일을 겪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데이비드 노비츠, 캐서린 윌슨)이 생각났다. 이들도 이런 형태의 지식을 말하면서, - 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것'(know what it is like to~)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어떤 사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고 증명을 통해서 정당화가 될 필요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해서, 나는 이 지식을 현상적 지식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상적 지식에 관한 철학자들(프랭크 잭슨, 얼 코네)의 논의를 통해서 이들을 비판했다.

이번에 다시 현상적 믿음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면서, 조금더 분명해진 것은 노비츠나 윌슨이 말했던 지식은, 경험의 현상적 속성과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현상적 지식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작품이 묘사하는 방식으로 사건이 전개될 가능성, 특정한 상황에서 주인공처럼 반응할 가능성에 대한 지식에 가깝다는 것이다. 차머스가 말하는 것처럼 현상적 지식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현상적 속성을 대면하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는 지식이라면, 작품 속 상황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현상적 지식도 그 상황에 직접 있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다. 노비츠나 윌슨에 대한 나의 주된 비판의 근거도 그러한 것이었다. 아무리 소설이나 영화가 간접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 사태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직접 경험하는 것은, 작품의 물질성, 종이책의 경우에는 종이를 넘길 때의 느낌이나 책의 두께감, 표지의 디자인이나 감촉 같은 것이 아닐까. 작품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에 현상적 지식이 갖는 알맹이는 작품이 제공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읽고 그런 사태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오만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노비츠나 윌슨이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라고 말한 것을 조금더 호의적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현상적 지식의 성립을 위해서 필요한 알맹이를 작품이 제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그런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과 관련된 지식은 제공해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건 일종의 양상 지식(modal knowledge)인데, 이미 이런 종류의 지식을 내러티브 예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떤 종류의 지식을 얻던지 간에, 이는 예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석사 논문 쓸 때 했던 생각은, 예술을 통해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작품 바깥의 세상이 아니라, 결국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었다. 물론 작품은 주제를 통해서 세상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관한 새로운 발견이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기 보다는, 작품의 이러한 구성과 짜임새, 이러한 내면의 결을 가진 가공의 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경유해서 전해지기 때문에, 나의 인지 체계에 더 깊은 울림을 남기고 조금더 밀도있게 통합되는게 아닐가 생각했었다. 사실 이 주제에 관한 학위 논문을 썻지만, 여전히 내 입장을 어떻게 정해야하는지 잘 모르겠고 생각은 복잡한데, 언젠가 다른 연구를 통해서 그 생각을 펼쳐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상들

작년에 비해서는, 논문 아닌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그런 글에 대한 아이디어가 머리 속에 좀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같다. 나는 각자가 써온 글 (혹은 논문의 일부) 을 읽는 같이 모임을 3주에 한 번씩 참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이 내 글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니까 또 새로운 글에 대한 아이디어도 자주 생각난다. 이 페이지에 올린 글들도 대학원 일기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모임에서 먼저 읽고 수정해서 완성한 것이다.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추상적인 문제의식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다른 곳에서 재료들도 찾고 그 재료들과의 적절한 관계도 설정하고.. 마감날짜를 스스로 정해서 살을 붙여서 얼른얼른 써야하는데.. 학기 중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을 힘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강렬한 동기를 집어넣어서 힘을 써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힘은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은 아껴두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순간에 온힘을 다 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을 그러한 의지로 불태우면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메모 수준으로 남아있는 쓰다만 글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힘을 내보고 싶기도 하다...💦💦)



Previous
Previous

4-5월의 일들: 천문학자의 일과 과제 채점.

Next
Next

1월의 일들: 종강, 장학금 지원, 교수법 워크숍.